
솔직히 고백하자면, 요즘 저는 매일 아침 출근길이 두렵습니다. 챗GPT다, 클로드다 하는 생성형 AI들이 쏟아내는 결과물을 볼 때마다 ‘내가 이 짓을 언제까지 해서 밥 벌어 먹고살 수 있을까’ 하는 서늘한 공포가 목덜미를 스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업무와는 전혀 상관없는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미시간 대학교의 ‘동물 다양성 웹(Animal Diversity Web, ADW)’이라는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묘한 위로와 동시에 따끔한 일침을 얻었습니다. 화려한 UX/UI로 무장한 요즘 핀테크 앱과는 거리가 먼, 흡사 90년대 하이텔이나 천리안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투박한 텍스트 기반의 사이트였습니다. 하지만 그 투박함 속에 숨겨진 견고한 ‘분류의 미학’이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이 사이트는 동물계(Animalia)를 최상위로 두고, 경골어류, 양서류, 포유류, 곤충 등으로 아주 정직하고 엄격하게 분류(Classification)하고 있습니다. 개발자나 기획자라면 여기서 무언가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기획’이나 ‘아키텍처 설계’를 한다고 모여서 화이트보드에 끄적거리는 것들을 한번 떠올려보세요. 비즈니스 요구사항이라는 핑계로 온갖 기능(Feature)들을 뎁스(Depth) 구분 없이 나열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ADW는 단순히 사자, 호랑이, 곰을 나열하는 게 아니라, 그들이 속한 ‘목-과-속-종’의 위계를 명확히 합니다. 저는 이 사이트를 보면서 우리 팀의 지라(Jira) 백로그를 떠올렸습니다. 체계 없이 쌓여만 가는 티켓들, 부모-자식 관계가 깨진 이슈들, 도메인 주도 설계(DDD)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모듈화조차 안 된 누더기 같은 기획서들 말입니다.

현장에서 주니어 PM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가 바로 이 지점입니다. "고객이 원하니까요", "개발팀에서 라이브러리가 있대요"라며 맥락 없이 기능을 추가합니다. 이건 마치 포유류 카테고리에 갑자기 '날개 달린 것'이라는 기준으로 파리를 집어넣는 것과 같습니다. ADW의 분류 체계가 보여주는 것은 데이터의 ‘무결성’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사투입니다. 키워드 검색, 표본, 소리, 지도 같은 메타데이터들이 각 개체(Object)에 어떻게 매핑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는 교과서나 다름없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서비스의 DB 스키마가, 그리고 API 명세서가 이 정도로 논리적인 계층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자문해봐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서비스는 트래픽이 조금만 몰려도, 혹은 새로운 비즈니스 로직이 하나만 추가되어도 와르르 무너질 모래성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ADW의 면책 조항(Disclaimer)입니다. "이 자료는 주로 대학생들이 작성했으며, 최신 정보가 아닐 수 있고 정확성을 보장하지 않는다"라고 아주 솔직하게 적혀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무릎을 쳤습니다. 삼성전자나 SK텔레콤 같은 대기업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 가장 힘들었던 것이 완벽주의였습니다. 완벽하지 않으면 릴리즈조차 못 하게 하는 경직된 문화가 오히려 혁신을 가로막곤 했죠. 그런데 이 학술 사이트는 ‘불완전함’을 전제로 거대한 지식의 생태계를 구축했습니다. 완벽한 데이터 한 줄보다, 불완전하더라도 거대한 맥락(Context)을 연결하는 구조가 더 가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입니다. 우리가 애자일(Agile)을 외치면서도 정작 문서는 워터폴 시절의 완벽함을 추구하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하게 됩니다.
결국 AI 시대에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은 코드를 더 빨리 짜거나, 화면을 더 예쁘게 그리는 게 아닙니다. 그건 이미 AI가 우리보다 잘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ADW가 보여준 것처럼 혼란스러운 정보(Chaos)에 질서(Order)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AI에게 "동물 정보를 줘"라고 하는 것과, "척삭동물문 포유강 식육목에 속하는 동물 중 북미에 서식하는 종의 데이터를 JSON으로 줘"라고 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후자의 질문을 던질 수 있으려면, 그리고 그 결과를 검증하려면 우리 머릿속에 명확한 '분류 체계(Taxonomy)'가 있어야 합니다.
후배님들, 오늘 작성한 기획서나 코드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세요. 그저 기능의 나열입니까, 아니면 견고한 구조 위에서 숨 쉬는 유기체입니까? 만약 전자라면, 죄송하지만 내년 이맘때 당신의 자리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데이터의 뼈대(Structure)를 세우는 자만이 AI라는 거대한 파도 위에서 서핑을 즐길 수 있을 테니까요. 투박하지만 기본에 충실한 저 동물 다양성 웹이, 화려한 기술 스택 자랑에 취해있는 우리에게 보내는 조용한 경고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