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해서, 오늘 아침 회의 때 속으로 욕 좀 했습니다.
갓 입사한 주니어 개발자가 "코드 짤 시간도 없는데 왜 이렇게 회의만 하냐"며 입을 삐죽거리더군요.
저도 20대 때는 그랬습니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시절, 윗분들이 파워포인트 줄 간격 맞추는 걸 보며 '저게 무슨 혁신이야'라고 비웃었죠.
그런데 산전수전 다 겪고 팀장이 되어보니 알겠습니다.
여러분이 '비효율'이라고 부르는 그 덩어리들이, 사실은 거대한 조직이 굴러가는 '물리 법칙'이라는 걸요.
구글(Google)과 노텔(Nortel)을 거친 베테랑 엔지니어 필립 오툴(Philip O'Toole)의 글을 보다가 무릎을 탁 쳤습니다.
대기업을 욕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왜' 그렇게 돌아가는지 이해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오늘은 교과서엔 절대 안 나오는, 하지만 알면 연봉 앞자리가 바뀌는 '대기업의 진짜 생리'를 털어놓으려 합니다.
어디 가서 팀장님이 이런 말 했다고 하지 마세요.
1. 회의가 많은 건 '무능'해서가 아닙니다
"스타트업에선 10분이면 끝날 얘기였는데!"
맞습니다. 스타트업은 10명이 모여서 "야, 이거 하자" 하면 끝입니다.
이걸 조정 비용(Coordination Cost)이 '0'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런데 개발자 1,000명이 넘는 조직이라면 어떨까요?
당신이 무심코 수정한 API 하나가, 저 지구 반대편 결제 모듈을 터뜨릴 수 있습니다.
대기업에서 가장 비싼 자원은 '개발 실력'이 아니라 '조정(Coordination)'입니다.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것보다, '누가 무엇을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지' 합의하는 게 더 어렵습니다.
회의가 많은 건 조직이 썩어서가 아니라, 조직이 '크기 때문'입니다.
이걸 이해 못하고 "코딩할 시간 주세요"라고 징징대면, 리더 눈엔 그냥 '전체 그림 못 보는 애'로 찍힙니다.
2. 임원의 '뇌피셜'이 팩트보다 강한 이유
개발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죠.
데이터 들고 갔더니 임원이 "내 생각은 다른데?"라며 다 엎어버릴 때. 소위 HiPPO(Highest Paid Person's Opinion) 현상입니다.
저도 SK텔레콤 시절, AI 스피커 로그 데이터 들이밀며 싸워봤습니다.
그런데 뼈저리게 느낀 건, 그 임원들이 '고객의 대리인(Proxy)'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거대 조직에선 개발자와 실제 고객 사이에 수많은 레이어가 존재합니다.
임원은 그 간극을 메우고, 비즈니스적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기술적으로 완벽한 로직보다, 임원이 감지한 '시장 타이밍'이 더 중요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서 선택지는 두 개뿐입니다.
임원이 원하는 걸 만들어주거나, 아니면 임원이 딴생각을 하게끔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임원이 기술을 몰라요"라고 불평하는 건, 그 사람이 왜 그 자리에 앉아 있는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3. '절차'는 겁쟁이들이 만든 게 아닙니다
"배포 한 번 하려는데 결재 라인이 왜 5단계나 되죠?"
답답하죠. 저도 압니다.
하지만 스타트업의 코드와 대기업의 코드는 '무게'가 다릅니다.
스타트업 앱은 서버가 죽으면 "죄송합니다" 공지 띄우고 고치면 됩니다. 유저들도 쿨하죠.
하지만 금융 앱이나 통신사 서버가 1분 멈추면?
9시 뉴스에 나오고, 주가가 빠지고, 누군가는 옷을 벗습니다.
이걸 '미션 크리티컬(Mission Critical)'이라고 부릅니다.
복잡한 프로세스와 관료주의는 개발자를 괴롭히려고 만든 게 아닙니다.
사고 쳤을 때 발생하는 천문학적인 '복구 비용'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입니다.
필립 오툴은 이렇게 비유하더군요.
"나무집 지어봤다고 해서, 다리 건설 현장에 안전 규제가 너무 많다고 불평하는 꼴이다."
당신의 코드가 '중요하기 때문에' 절차가 복잡한 겁니다.

결국 관점의 차이입니다.
대기업의 시스템을 그저 '악'으로 규정하면, 당신은 평생 불평만 하는 실무자로 남게 됩니다.
하지만 그 시스템이 '리스크 관리'와 '규모의 경제'를 위해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면?
그때부터는 그 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게 됩니다.
Cursor나 Gemini 같은 AI 툴로 코딩 속도를 높이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진짜 일 잘하는 시니어는, AI가 짜준 코드를 들고 '어느 회의에 들어가서 누구를 설득해야 할지' 아는 사람입니다.
내일 출근해서 또 지루한 주간 회의가 잡혀있겠죠.
한숨 쉬지 말고 생각해보세요.
"이 회의는 우리 시스템의 어떤 부분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가?"
그걸 파악하는 순간, 당신은 더 이상 부품이 아니라 '플레이어'가 되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