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해봅시다. 우리 모두 술자리에서 한 번쯤은 이런 안주를 씹지 않습니까? "아니, 대우를 해줘야 일을 더 하지. 월급은 쥐꼬리인데 책임감은 임원급으로 요구하네?" 저도 그랬습니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시절, 저는 불만이 가득 찬 시한폭탄이었습니다. 제 논리는 단순했습니다. "나를 시니어로 승진시켜 달라. 그러면 시니어처럼 일하겠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3년 내내 승진 누락이었습니다. 당시 팀장은 저를 불러다 놓고 답답하다는 듯 말했죠. "성철아, 넌 일은 잘하는데... 딱 네 일만 해." 그때는 그 말이 꼰대의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처럼 들렸습니다. JIRA 티켓을 누구보다 빨리 처리하고, 할당된 개발 건은 밤을 새워서라도 끝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3년이라는 시간을 허송세월하고 나서야, 그리고 최근 읽은 앤드류 그레이엄 율의 글을 보고서야 제가 왜 철저히 외면받았는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핵심은 간단합니다. "승진하고 싶다면, 이미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제 치명적인 실수는 '허락'을 기다린 것이었습니다. 직함이 생기면 그때부터 리더십을 발휘하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조직의 생리는 정반대였습니다. 타이틀은 나무에서 떨어지는 감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미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을 때, 비로소 뒤따라오는 후행 지표일 뿐이었습니다.
최근 제 팀에도 눈길을 끄는 주니어 엔지니어가 한 명 있습니다. 연차는 고작 2년 차인데, 하는 짓은 영락없는 시니어입니다. 어느 날 저에게 슬랙을 보내더군요. "PM님, 이 서비스의 인시던트를 줄이기 위한 RFC를 작성했습니다. 현재 아키텍처의 병목을 해결하려면 Redis 캐싱 레이어를 도입해야 하는데, 리소스 비용은 월 20만 원 정도 늘지만 이탈률은 15% 줄일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친구가 무서운 건, 제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는 점입니다. 단순히 "서버가 느려요"라고 불평(Issue Raising)만 하는 게 아니라, 제 관점에서 비즈니스 임팩트와 비용을 계산해 해결책(Solution)까지 들고 왔습니다. 이게 바로 글에서 말하는 "내 자리를 맡아보는(Take my position)" 행위입니다. 제 업무를 뺏으라는 게 아니라, 제가 앓고 있는 두통거리를 대신 고민하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포인트는 '지속성(Consistency)'입니다. 한 번의 화려한 퍼포먼스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짜 승진은 6개월 이상의 꾸준한 패턴에서 나옵니다. 매니저들은 바보가 아닙니다. 그들은 묻습니다. "내가 보지 않을 때도, 화려한 신기술 도입 프로젝트가 아니라 지루한 레거시 코드를 리팩토링할 때도 이 친구가 팀 전체를 생각할까?" 6개월간의 일관된 행동만이 이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지금은 AI가 코드를 짜주는 시대입니다. Cursor나 Claude에게 프롬프트만 잘 던져도 단위 테스트 코드는 뚝딱 나옵니다. 이제 단순히 주어진 기능을 구현하는 '코더'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역설적으로 AI 시대에 인간에게 남은 유일한 무기는 '문제를 정의하고 범위를 확장하는 능력'입니다. 제 자리를 위협하는 건 AI가 아니라, AI를 도구 삼아 제 관점으로 비즈니스를 바라보는 저 맹랑한 주니어 녀석일지도 모릅니다.
직함은 행동을 따릅니다. 절대 반대가 아닙니다.
혹시 지금도 "대리 달아주면 열심히 할게요"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뼈아픈 경험자로서 조언합니다. 그 생각 버리십시오. 오늘 당장 매니저의 모니터를 훔쳐보듯 그들의 골칫거리를 내 문제로 가져오십시오. 3년 뒤에 땅을 치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