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8년, 스티브 잡스의 딸 리사 브레넌 잡스가 회고록을 냈을 때 실리콘밸리는 잠시 술렁였습니다. 책 제목이나 가족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책이 묘사한, 우리가 '혁신의 아이콘'이라 추앙하던 인물의 실체가 "정말 썩은 사람(Truly rotten person)"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다시 꺼내 읽으며 창업 씬에 만연한 '잘못된 신화'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오늘도 공유 오피스 어딘가에서 직원들에게 소리를 지르며 본인의 무례함을 '혁신을 위한 열정'으로 포장하고 계신 대표님들. 혹은 그런 리더 밑에서 "이게 다 성장을 위한 과정이야"라며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는 주니어 분들.
냉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잡스 코스프레 그만하세요. 우리 통장에 애플의 현금 보유고가 찍히기 전까지, 그건 그냥 비즈니스 자해 공갈입니다.
낭만 걷어낸 '인성 파탄'의 경제학
많은 초기 창업자들이 착각하는 공식이 있습니다.
괴팍한 성격 + 디테일에 대한 집착 = 스티브 잡스 같은 성공
천만에요. 이 공식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가 빠졌습니다. 바로 '압도적인 천재성'과 '대체 불가능한 시장 지배력'입니다. 잡스는 그가 썩은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애플을 성공시킨 것이지, 썩은 사람이어서 성공한 게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도덕성이 아닙니다. 저는 도덕 선생님이 아닙니다. 철저히 손익계산서(P&L) 관점에서 봅니다.
리더의 감정적 폭발과 독단적인 태도가 회사에 미치는 비용은 구체적입니다.
높은 퇴사율과 채용 비용 (Hiring Cost)
스타트업에서 사람 한 명을 채용하고 온보딩시켜 제 몫(1인분)을 하게 만드는 데 최소 3개월에서 6개월이 걸립니다. 대표의 '성질머리' 때문에 핵심 개발자가 나간다? 그건 단순히 인력 손실이 아니라, 그 기간 동안 태워버린 현금(Burn rate)을 하수구에 버리는 행위입니다.
커뮤니케이션 비용 증가
잡스의 주변인들이 그의 행동을 방조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이게 조직에선 어떻게 나타날까요? 직원들이 문제의 본질을 보고하는 게 아니라, '대표님 기분 안 거스르는 법'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버그가 터졌는데 대표가 화낼까 봐 숨깁니다. 런웨이(Runway)가 3개월 남았는데 긍정적인 지표만 보고합니다. 결과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서비스 종료입니다.
잡스의 '현실 왜곡장'은 당신에게 없다
LG CNS 시절, SI 프로젝트를 할 때 종종 마주쳤던 유형이 있습니다. 개발 일정이나 기술적 제약은 무시하고 "무조건 되게 하라"고 압박하는 PM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잡스에 빙의시켰을지 모르지만, 개발자들 눈에는 그저 '현실 감각 없는 빌런'일 뿐이었습니다.
잡스의 현실 왜곡장은 불가능한 기술을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일반적인 스타트업 대표의 현실 왜곡장은 '멀쩡한 팀원의 멘탈'을 붕괴시킵니다.
특히 "고객을 만나지 않고 모니터 뒤에 숨어있는 기획자"나 "비즈니스 임팩트보다 코드 퀄리티만 따지는 개발자"를 혐오한다고 해서, 그들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가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
저 역시 그런 부류를 싫어합니다. 하지만 해결책은 '화'가 아니라 '데이터'여야 합니다.
"네 코드가 쓰레기야"라고 소리치는 대신, "이 기능 배포 후 전환율이 0.5% 떨어졌어. 롤백하고 원인 분석해서 가져와"라고 말하는 게 비즈니스입니다. 전자는 감정 배설이고, 후자는 경영입니다.
방조자들(Enablers)이 회사를 망친다
기사에서 흥미로운 점은 주변 사람들이 잡스의 행동을 방조(Enabled)했다는 사실입니다.
스타트업 초기 멤버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입니다. 창업자의 카리스마에 눌려, 혹은 스톡옵션이라는 희망 고문에 묶여 비합리적인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릅니다.
"대표님이 원래 좀 천재 스타일이라 그래."
"우리가 참으면 유니콘 될 수 있어."
죄송하지만, 그런 회사는 유니콘이 아니라 좀비 기업이 됩니다. 내부에서 자정 작용이 일어나지 않는 조직은 시장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합니다. 대표의 입맛에 맞는 데이터만 보고되기 때문입니다.
비바리퍼블리카(Toss)에서 일하며 뼈저리게 느낀 건, 건강한 충돌(Conflict)이 없는 조직은 죽은 조직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그 충돌은 '상호 존중'을 전제로 해야 생산적입니다. 공포에 질린 조직에서는 그 어떤 혁신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생존 본능'만 남을 뿐입니다.
결론: 거울 보지 말고, 통장을 보세요
창업자 여러분,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있는 위인전을 덮으세요. 잡스의 전기에서 배울 건 디자인 철학이지, 그의 인격 파탄이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BEP(손익분기점) 달성과 생존입니다. 당신의 짜증 한 번이 팀의 사기를 꺾고, 그로 인해 배포가 하루 늦어지고, 그 하루가 경쟁사에게 기회를 준다면, 당신은 그날 회사 통장에서 돈을 빼서 불태운 것과 같습니다.
리더의 역할은 팀원들에게 공포를 심어주는 게 아니라, 그들이 고객에게 집착할 수 있도록 장애물을 치워주는 것입니다. 그 장애물이 본인의 '성격'이라면, 그것부터 치우십시오.
낭만은 없습니다. 살아남는 것만이 현실입니다. 당신의 '잡스병'이 완치되지 않는다면, 내년 이맘때 폐업 신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확률은 99.9%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