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업 초기, 저는 사업계획서(Business Plan)를 성경처럼 여겼습니다.
완벽한 논리, 아름다운 장표, 그리고 우상향하는 예상 매출 그래프.
하지만 시장에 제품을 내놓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고객은 제 계획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을요.
마치 복싱 전설 마이크 타이슨의 말처럼요.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쳐맞기 전까지는."
오늘은 역사상 가장 비싸게 '쳐맞은' 군사 훈련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그리고 그 실패를 감추려다 더 큰 재앙을 초래한 조직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B2B SaaS를 만들며 저지르는 치명적인 실수를 되짚어보겠습니다.
2002년, 2억 5천만 달러짜리 시뮬레이션
미군은 '밀레니엄 챌린지 2002(MC '02)'라는 거대한 훈련을 기획합니다.
들어간 돈만 한화로 약 2,500억 원.
목적은 하나였습니다.
첨단 기술로 무장한 미군(Blue Team)이 미래전에서 얼마나 압도적인지 증명하는 것이었죠.
적군(Red Team)의 수장은 해병대 예비역 중장 폴 반 리퍼(Paul Van Riper)였습니다.
미군은 자신만만했습니다.
최첨단 감청 기술과 레이더로 적의 모든 통신을 엿듣고 선제타격할 계획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게임이 시작되자마자 상황은 꼬이기 시작합니다.
압도적인 기술, 처참한 패배
반 리퍼 장군은 미군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전술을 씁니다.
도청당할 수 있는 무전기나 핸드폰을 아예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오토바이 전령을 통해 명령을 전달하고, 모스크의 기도 소리에 암호를 섞어 보냈습니다.
미군의 최첨단 감청 시스템은 무용지물이 됐습니다.
더 충격적인 건 교전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값비싼 군함 대신, 소형 낚시배와 레저용 보트에 폭탄을 실어 미군 함대로 돌진시켰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훈련 개시 하루 만에 미군 함정 16척이 침몰했습니다.
가상 시뮬레이션이었지만, 사망자로 치면 2만 명이 넘는 수치였습니다.
미군의 '완벽한 시나리오'가 '현실적인 변칙'에 박살이 난 겁니다.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조직
여기서부터가 진짜 문제입니다.
수천억 원을 들인 이 훈련의 목적은 '미군의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주최 측인 합동전력사령부는 훈련을 일시 중지(Pause) 시켰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미군 함정 16척을 데이터상으로 부활시켰습니다.
반 리퍼 장군에게는 황당한 제약을 걸었습니다.
"통신할 때 오토바이 쓰지 말고 무전기를 써라."
"미군이 요격할 수 있게 비행기를 띄워라."
결국 훈련은 정해진 각본대로 미군의 압승으로 끝났습니다.
조직은 안도했고, 예산은 집행되었으며, 보고서는 아름답게 포장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정신승리'의 대가는 컸습니다.
이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실전에서 미군은 비정규군의 변칙 전술에 엄청난 고전을 하게 됩니다.
우리의 프로덕트는 어떤가요?
저는 이 사례를 보며 뜨끔했습니다.
우리도 프로덕트를 개발할 때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Happy Path(행복한 경로)'만 가정합니다.
유저가 우리가 의도한 순서대로 버튼을 누르고,
우리가 설계한 대로 기능을 활용할 것이라 믿습니다.
QA(품질 보증)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발자가 기획한 대로만 테스트하면 버그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실제 유저(Red Team)는 반 리퍼 장군 같습니다.
네트워크가 불안정한 지하철에서 결제를 시도하고,
뒤로 가기 버튼을 연타하며,
입력 필드에 특수문자를 마구잡이로 집어넣습니다.
그때 시스템이 뻗거나 에러가 나면 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아, 그건 엣지 케이스(Edge Case)니까 나중에 처리하죠."
이게 바로 미군이 함정을 부활시킨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고, 성공하고 싶은 마음에 데이터를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법
SaaS를 운영하며 뼈저리게 느낀 건,
'고객은 우리를 교육시키려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제품이 불편하면 조용히 떠납니다(Churn).
그래서 우리는 의도적으로 'Red Team'을 운용해야 합니다.
제가 제안하는 액션 아이템은 세 가지입니다.
1. 도그푸딩(Dogfooding)의 강도를 높이세요.
내부 직원들이 우리 제품을 쓸 때, 매뉴얼대로 쓰지 못하게 하세요. 가장 열악한 환경, 가장 말도 안 되는 데이터를 넣고 부하 테스트를 해야 합니다.
2. '조작된 성공'을 경계하세요.
투자자 보고용이나 팀 사기 진작을 위해 지표를 예쁘게 포장하지 마세요. MAU(월간 활성 사용자)가 늘었다고 좋아하기 전에, 실제 리텐션(Retention)이 박살 나고 있지는 않은지, 반 리퍼 장군 같은 '변칙 유저'가 이탈하고 있지는 않은지 봐야 합니다.
3. 실패한 시나리오를 자산화하세요.
배포 후 롤백(Rollback)하는 상황이 생기면, 누군가를 문책하는 대신 그 '예상치 못한 상황'이 왜 발생했는지 포스트모텀(Post-Mortem)을 철저히 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조직의 진짜 실력이 됩니다.
사업은 시뮬레이션이 아닙니다.
매출이 안 나온다고 해서 서버를 리셋하고 다시 시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계획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고객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2,500억짜리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비싼 교훈일 겁니다.
오늘도 로그를 열어보세요.
우리의 예상을 빗나간 에러 로그 속에, 진짜 성장의 힌트가 숨어있을지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