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해, 저는 '감성'이라는 단어를 혐오했습니다. 에이전시 인턴 시절, 클라이언트가 던지는 "뭔가 엣지있게", "겨울 느낌 낭낭하게" 같은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제 모니터 뒤편에는 늘 '?'가 떠다녔으니까요. 디자인은 수학이고 논리라고 믿었습니다. Figma의 Auto-layout 기능으로 픽셀 하나 어긋나지 않게 정렬하고, 개발자에게 넘길 제플린(Zeplin) 가이드에 여백 수치를 명시하는 것만이 '진짜 디자인'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제 좁은 시야를 부끄럽게 만든 한 '장인'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습니다. 제임스 니휴스(James Niehues). 아마 이름은 생소하겠지만, 여러분이 해외 스키장 리조트 사이트에서 본 그 아름다운 슬로프 지도는 99% 이 사람의 손끝에서 나왔을 겁니다.
처음엔 그저 "그림 잘 그리는 할아버지네"라고 넘겼습니다. 하지만 그가 작업하는 방식을 뜯어보다가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졌습니다. 이분은 화가가 아니라, 현존하는 최고의 UX 디자이너였기 때문입니다.

니휴스는 컴퓨터를 쓰지 않습니다. 35년 동안 오직 붓과 물감으로 지도를 그렸습니다. 제가 충격을 받은 건 그 이유였습니다.
"컴퓨터로 만든 지도는 무미건조해요. 마치 사무실을 떠올리게 하죠. 산 정상에 올라갔을 때의 그 벅찬 느낌이 없습니다."
공대생 마인드로 무장한 저에게 이 말은 처음엔 '아날로그 감성팔이'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그의 작업 프로세스를 들여다보니 그 속에는 철저한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 설계가 숨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실적인 정보 전달'이 최고라고 착각합니다. 구글 맵이나 위성 지도가 가장 정확하니까요. 하지만 니휴스는 말합니다. "3차원인 산을 2차원 평면에 그대로 옮기면, 사용자는 길을 잃는다."
실제 산은 360도로 펼쳐져 있습니다. 이걸 평면 모니터나 종이 한 장에 '있는 그대로' 담으면, 뒷면의 슬로프는 보이지 않고 원근감은 왜곡됩니다. 니휴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실을 고의적으로 '왜곡(Distortion)'합니다. 스키어가 슬로프를 내려오며 마주할 시각적 정보의 위계(Hierarchy)를 재설계하는 것이죠.
그는 수만 그루의 나무를 하나하나 직접 그립니다. 침엽수인지 활엽수인지까지 구분해서요. 미친 짓 같나요? 아닙니다. 스키어들에게는 그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종류에 따라 눈이 쌓이는 정도가 다르고, 그늘이 지는 위치가 달라지니까요. 그는 사용자가 '필요로 하는 정보'를 위해 붓질 하나까지 철저히 계산한 겁니다.
제가 Figma에서 컴포넌트를 복사-붙여넣기 하며 "효율적이다"라고 자화자찬할 때, 그는 사용자의 멘탈 모델(Mental Model)을 고려해 현실 세계의 데이터를 큐레이션하고 있었던 겁니다.

저는 그동안 개발 가이드를 작성할 때, "여기 여백은 24px입니다"라고 적는 것에만 집착했습니다. 정작 그 화면을 마주할 사용자가 느낄 '답답함'이나 '설렘' 같은 맥락은 "개발 구현 난이도가 높다"는 핑계로 외면했는지도 모릅니다. 니휴스가 말한 "정성 들여 그린 삽화는 질 높은 스키 경험을 반영한다(A quality illustration reflects a quality ski experience)"는 말은, 우리 식으로 바꾸면 "디테일한 인터랙션 하나가 서비스 전체의 신뢰도를 결정한다"는 뜻일 겁니다.
이 인터뷰를 보고 난 뒤, 저는 습관적으로 사용하던 아이콘 라이브러리를 끄고 펜 툴을 다시 잡았습니다. 그리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봤습니다. 내가 만든 이 화면은 사용자를 사무실 책상 앞에 앉혀두는 '건조한 지도'일까, 아니면 가슴 뛰는 설원을 상상하게 만드는 '니휴스의 지도'일까.
우리는 효율성을 핑계로 너무 쉽게 '감정'을 삭제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기술적인 스펙(Spec)과 논리 뒤에 숨어, 정작 사용자가 진짜 원하는 '경험'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오늘 밤은 유난히 고민이 깊어집니다.
차가운 픽셀 속에 사람의 온기를 담는 것.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진짜 '논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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