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소위 말하는 '미대 감성'보다 1px이라도 딱 맞아떨어지는 '공대 논리'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8pt 그리드 시스템에 맞춰 컴포넌트들이 레고 블록처럼 조립될 때 희열을 느끼고, 디자인 시스템 가이드 문서 만드는 걸 취미 생활처럼 즐기죠. 그런데 최근 우연히 마주한 '2000년대 초반 게임 웹사이트' 아카이브를 보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디아블로 2, 스타크래프트, 심즈, 그리고 넥슨의 전성기 시절 웹사이트들. 지금 보면 해상도는 깨지고, 접근성은 엉망이며, 모바일 대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총체적 난국'입니다. 하지만 그 난장판 속에는 지금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압도적인 몰입감'과 '브랜드 세계관'입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깨끗한 UI'라는 안전지대에 숨어있는 건 아닐까요? 이 글은 과거의 향수에 젖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천편일률적인 포트폴리오 사이에서 생존하기 위해, 우리가 20년 전의 '카오스'에서 무엇을 훔쳐와야 하는지에 대한 생존 기록입니다.
문제 상황: 우리는 '사용성'을 핑계로 '지루함'을 만들고 있습니다
요즘 주니어 디자이너들의 포트폴리오를 리뷰하다 보면 10개 중 9개가 똑같습니다. 큼직한 히어로 이미지, 왼쪽 정렬된 산세리프 폰트, 둥근 모서리의 CTA 버튼. 물론 저도 그렇게 작업합니다. 그게 개발 구현도 쉽고, 사용성 테스트(UT) 통과하기도 좋으니까요.
하지만 'Web Design Museum'에서 본 2000년대 초반 웹사이트들은 달랐습니다.

그 시절 웹사이트는 정보 전달 도구가 아니라, 게임의 연장선이었습니다. 버튼 하나가 돌덩이처럼 생겼고, 마우스를 올리면 횃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났습니다. 플래시(Flash)라는 도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자유였지만, 핵심은 도구가 아니라 '태도'였습니다. 사용자가 사이트에 들어오는 순간, 현실 세계를 잊고 게임 세계관에 갇히게 만들겠다는 명확한 의도가 있었죠. 반면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사용자의 이탈률을 줄이겠다는 강박 때문에, 사용자가 '머물고 싶은' 이유를 삭제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실패 사례: 맥락 없는 '레트로'와 'Y2K'의 함정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되는 지점이 있습니다. "아, 요즘 Y2K가 유행이니까 나도 2000년대 스타일로 화려하게 만들어야지!"라고 생각했다면 큰 오산입니다. 제가 인턴 시절 겪었던 뼈아픈 실패담을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당시 핀테크 앱의 이벤트 페이지 디자인을 맡았는데, '뉴트로' 컨셉이랍시고 픽셀 아트와 현란한 네온 컬러를 사용했습니다.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개발 팀장님은 "이 이미지 리소스 용량 때문에 로딩 속도가 3초나 지연된다"며 난색을 표했고, 기획 팀장님은 "신뢰감이 생명인 금융 앱에서 장난치는 것 같다"고 혹평했습니다.
저는 2000년대 웹사이트의 '껍데기(Visual)'만 베꼈지, 그 안에 담긴 '설계(Logic)'를 보지 못했던 겁니다. 게임 사이트가 화려했던 건 사용자가 '재미'를 기대하고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금융 앱은 '빠른 송금'이 목적입니다. 목적에 맞지 않는 화려함은 UX 관점에서 명백한 노이즈(Noise)일 뿐입니다.
깨달음과 액션 아이템: 논리적인 '광기'를 설계하세요
그렇다면 우리는 이 과거의 유산에서 무엇을 적용해야 할까요? 정답은 '브랜딩의 논리적 주입'입니다. 단순히 예쁘게 꾸미는 게 아니라, 서비스의 성격에 맞춰 '어디까지 망가질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목적에 따른 톤앤매너 분리 (Separation of Concerns)
여러분이 만드는 서비스가 '유틸리티(Utility)'인지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인지 명확히 정의하세요. 어드민 페이지나 대시보드를 스타크래프트 커맨드 센터처럼 만들면 안 됩니다. 하지만 프로모션 페이지나 브랜드 소개 페이지라면? 과감하게 그리드를 파괴하고 2000년대식 몰입감을 시도해보세요. 사용자는 뻔한 레이아웃에 지쳐 있습니다.
개발자를 위한 '변태 같은' 핸드오프 (Meticulous Handoff)
화려한 그래픽을 시도할수록 개발 가이드는 더욱 철저해야 합니다. 2000년대 웹사이트 느낌을 내겠다고 복잡한 텍스처를 쓴다면, 이미지를 통으로 내보내지 마세요.
- 배경 패턴은 반복 가능한(Tileable) 최소 단위로 잘랐는가?
- 고해상도 이미지는 WebP 포맷으로 압축했는가?
- 화려한 인터랙션이 모바일 환경에서 성능 저하를 일으키지 않는가?
디자이너의 감성이 개발자의 야근으로 이어져선 안 됩니다. 저는 이런 특수 페이지를 작업할 때는 제플린이나 피그마의 코멘트 기능을 넘어, 별도의 인터랙션 명세서를 엑셀로 정리해서 전달합니다. "여기서 슝~ 하고 나와요"가 아니라 "Ease-in-out 큐빅 베지에 곡선(0.42, 0, 0.58, 1)으로 0.3초간 투명도가 0에서 100으로 변합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마치며
2000년대 게임 웹사이트들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웹 표준 위반' 덩어리들입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사용자를 설득하고 매료시키려는 뜨거운 에너지가 있었습니다. AI가 코드를 짜고 UI를 그려주는 시대입니다. 깔끔하고 논리적인 디자인은 이제 기계가 더 잘합니다.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계는 흉내 낼 수 없는 '비논리적인 매력'을 가장 '논리적인 방식'으로 구현해야 합니다. 오늘 하루는 핀터레스트의 세련된 레퍼런스 대신, 20년 전 웹사이트들의 야생적인 에너지를 보며 "왜?"라는 질문을 던져보시길 바랍니다. 그 촌스러움 속에, 여러분의 디자인을 한 단계 도약시킬 열쇠가 숨어있을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