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합니다.
저는 '감성'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알레르기 반응이 올라옵니다.
에이전시 인턴 시절, 클라이언트가 "뭔가 엣지있게"라고 말할 때마다 모니터를 부수고 싶었던 기억, 다들 있으실 겁니다.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라 설득의 과정이자 논리의 집합이어야 합니다.
화려한 인터랙션, 블러 효과 가득한 모달 창, 다 좋습니다.
하지만 그 화장발을 다 지웠을 때, 여러분의 서비스는 과연 사용 가능한 상태인가요?
오늘은 제가 UI/UX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 몰래 뜯어보았던, 세상에서 가장 불친절하고 투박한 레퍼런스 하나를 공개합니다.
Figma도, Sketch도 없던 시절의 유물, 바로 텍스트 머드(MUD) 게임 'Aardwolf'입니다.
GUI라는 껍데기를 벗겨내라
Aardwolf는 1996년에 시작된 텍스트 기반 RPG입니다.
접속하면 검은 화면에 흰 글씨만 가득합니다.
요즘 세상에 이걸 누가 하냐고요?
놀랍게도 2025년 현재까지 업데이트가 되고 있습니다.
제가 이 게임을 주목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래픽 인터페이스(GUI)가 없는 상황에서 사용자를 어떻게 학습시키고, 길을 잃지 않게 만드는가에 대한 해답이 여기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버튼의 컬러, 폰트의 크기, 여백의 픽셀 단위에 집착합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정보의 위계(Information Hierarchy)와 멘탈 모델(Mental Model)입니다.
Aardwolf는 시각적 단서 없이 오로지 텍스트만으로 수백 개의 지역과 퍼즐을 탐험하게 만듭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1. 텍스트로 구현한 Line-of-Sight (가시성)
이 게임은 '실시간 시야 오버헤드 지도'를 텍스트로 제공합니다.
그래픽으로 맵을 그려주는 게 아닙니다.
주변의 캐릭터, 관심 지점(POI)을 텍스트 배열만으로 인지시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명확합니다.
사용자는 화려한 아이콘보다 '지금 내 위치가 어디고, 내 주변에 무엇이 있는가'를 직관적으로 아는 것을 원합니다.
여러분이 기획서 없이 화면을 그릴 때 가장 먼저 놓치는 부분이 바로 이 '맥락 정보'입니다.

2. 튜토리얼은 '설명'이 아니라 '경험'이다
앱을 처음 켜면 나오는 '코치마크' 3장, 솔직히 다들 스킵하시죠?
Aardwolf에는 'The Aylorian Academy'라는 시작 구역이 있습니다.
이곳은 단순한 도움말 페이지가 아닙니다.
사용자가 직접 명령어를 입력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며 시스템을 몸으로 익히는 인터랙티브 퀘스트 구간입니다.
"채팅창에 /help를 치세요"라고 툴팁을 띄우는 게 아니라, 문을 열지 못하면 다음 방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행동을 유도하고, 그 행동에 대한 피드백을 즉각적으로 주는 것.
이것이 진짜 온보딩입니다.
3. 개발자에게 사랑받는 '구조적 사고'
저는 개발 가이드 문서를 변태스러울 정도로 꼼꼼하게 작성하는 편입니다.
그 습관을 들이게 된 계기가 이 게임의 '빌더(Builder)' 시스템을 보고 나서입니다.
Aardwolf는 사용자가 직접 지역을 만들 수 있게 Lua 인터프리터를 제공합니다.
단순히 상상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라, 코드로 논리를 짜야 합니다.
이 게임의 구조를 뜯어보면, 28개의 직업과 수백 개의 스킬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습니다.
그런데도 2025년 9월 업데이트에서 'Swho' 옵션이 추가되고 주문 정렬 방식이 개선되는 등, 유지보수가 끊임없이 이루어집니다.
이는 초기 데이터베이스 설계와 정보 구조(IA)가 얼마나 탄탄한지를 반증합니다.
디자인 시스템을 만들 때 "이 버튼은 왜 여기 있어야 해?"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그건 디자인이 아니라 낙서입니다.
디자이너가 텍스트를 두려워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화면을 그리는 사람이기 이전에, 정보를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스타트업 현장은 시궁창입니다.
기획서는 부실하고, 일정은 촉박하고, 개발자는 안 된다고만 합니다.
그럴 때 화려한 레퍼런스 사이트인 핀터레스트나 드리블(Dribbble)만 보지 마세요.
오히려 Aardwolf 같은 텍스트 게임을 켜보세요.
이미지 한 장 없이 사용자를 몰입시키는 그 논리의 뼈대를 관찰하세요.
"왜 이 텍스트가 여기 배치되었는가?"
"왜 이 명령어는 이 시점에 필요한가?"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디자인은 개발자를 설득할 수 있고, 결국 사용자를 설득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픽셀 뒤에 숨겨진 논리를 찾느라 야근하는 주니어 디자이너분들.
우리, 겉만 번지르르한 '디자인 호소인'은 되지 맙시다.
뼈대부터 튼튼하게, 근거 있는 디자인을 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