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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 속 사용자를 위한 디자인: 엉뚱한 코 스타일러스가 가르쳐준 UX의 본질

욕조 속 사용자를 위한 디자인: 엉뚱한 코 스타일러스가 가르쳐준 UX의 본질

김다은·2026년 1월 4일·3

모바일 앱 프로젝트의 실패를 통해 깨달은 상황적 장애와 UX의 본질. 도미닉 윌콕스의 코 스타일러스가 던지는 사용자 환경 맥락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살펴봅니다.

얼마 전 모바일 앱 프로젝트의 사용성 테스트를 진행하며 뼈저린 패배감을 맛보았습니다. 피그마(Figma) 화면 속에서 완벽하게 정렬된 그리드와 세련된 인터랙션은, 흔들리는 지하철이나 한 손에 짐을 든 사용자의 실제 환경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졌습니다. 버튼은 너무 작았고, 제스처는 오작동했습니다. "디자인은 예쁜 그림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도구"라는 교과서적인 문장을 머리로만 알고 있었지,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습니다. 막막한 심정으로 레퍼런스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발견한 2011년의 한 기괴한 발명품은, 저에게 UX의 본질적인 '맥락(Context)'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도미닉 윌콕스(Dominic Wilcox)라는 디자이너가 만든 '터치스크린을 위한 손가락-코(Finger-Nose) 스타일러스'라는 작품입니다. 이 발명품의 탄생 배경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불편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작가는 욕조에서 반신욕을 하며 스마트폰을 사용하곤 했는데, 물에 젖은 손으로는 정전식 터치스크린이 작동하지 않았고 한 손으로 폰을 들고 조작하다가 물에 빠뜨릴 위험도 컸습니다. 그래서 그는 코에 스타일러스 펜이 달린 마스크를 쓰고, 고개를 끄덕이며 스크롤을 하거나 타이핑을 하는 해결책을 고안해냈습니다. 처음 이 이미지를 보았을 때는 그저 "재미있는 예술가의 기행" 정도로 치부하며 웃어넘겼습니다.

하지만 웃음기를 거두고 '사용자 경험'의 관점에서 다시 바라보자, 이 우스꽝스러운 마스크가 시사하는 바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흔히 '장애(Disability)'라고 하면 영구적인 신체 손상을 떠올리지만, UX 업계에서는 '상황적 장애(Situational Disability)'라는 개념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있어 문을 열지 못하거나, 밝은 태양광 아래서 화면이 보이지 않거나, 욕조에 있어 손을 쓰지 못하는 상황 모두가 일시적인 장애 상황에 해당합니다. 도미닉의 코 스타일러스는 바로 이 극단적인 상황(Edge Case)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직관적이고 물리적인 인터페이스였던 셈입니다. 실제로 해당 포스트의 댓글에는 손을 사용할 수 없는 절단 장애인이나 추운 날 장갑을 낀 사용자들에게 유용할 것 같다는 진지한 피드백이 달리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동안 '책상 위에 앉아, 최신형 스마트폰을 양손으로 공손히 쥐고 있는' 이상적인 사용자만을 상정하고 디자인해왔다는 사실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사용자는 욕조에 있을 수도 있고, 붐비는 만원 버스 손잡이를 잡고 있을 수도 있으며,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일 수도 있습니다. 이 엉뚱한 발명품을 본 이후, 저는 와이어프레임을 그릴 때마다 '이 버튼을 코로도 누를 수 있을까?'라는 엉뚱하지만 유효한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버튼의 터치 타겟(Touch Target)을 가이드라인인 44px 이상으로 키우는 것을 넘어, 사용자가 처한 환경적 맥락을 상상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의 시작점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사용자에게 코 스타일러스를 나눠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소프트웨어 차원에서 이러한 물리적 제약을 뛰어넘는 배려를 심을 수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손 조작을 고려해 주요 액션 버튼(FAB)을 화면 하단에 배치하거나, 음성 인식(Voice UI) 기능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것, 혹은 복잡한 제스처 대신 단순한 탭만으로도 과업을 완수할 수 있게 설계하는 것이 그 예입니다. 최근 접근성(Accessibility, a11y)이 단순히 도덕적인 의무가 아니라 비즈니스의 필수 요건이 되어가는 흐름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편의'인 기능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서비스를 사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생존'의 문제가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AI가 코드를 대신 짜주는 시대가 되었지만, 결국 그 기술이 닿아야 할 곳은 사람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입니다. 주니어 디자이너로서 화려한 인터랙션이나 트렌디한 그래픽에 현혹되기 쉽지만, 가끔은 이 '코 스타일러스'를 떠올리며 투박하더라도 사용자의 진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려 합니다. 가장 훌륭한 디자인은 가장 열악한 환경에서도 작동하는 디자인일 테니까요. 오늘 퇴근길에는 저도 윌콕스처럼,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제가 만든 앱을 '코'로 한번 눌러봐야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발견될 뜻밖의 불편함들이, 내일의 더 나은 디자인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김다은
김다은주니어 UI/UX 디자이너

'예쁜데요?'보다 '지표가 올랐네요'를 듣고 싶은 3년차 프로덕트 디자이너. 감성의 영역을 논리의 언어로 통역하며, 개발자와 기획자 사이에서 살아남는 실전 생존기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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