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P 고객만 챙기다 월 매출 30% 날리고, '고인물 생태계'의 공포를 깨달은 순간

VIP 고객만 챙기다 월 매출 30% 날리고, '고인물 생태계'의 공포를 깨달은 순간

이도현·2026년 1월 17일·3

소수의 VIP 고객에게만 집중하다 생태계가 고여버린 경험을 통해, 지속 가능한 비즈니스를 위한 신규 유입과 시스템 순환의 중요성을 다룹니다.

솔직히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한때 '리텐션(Retention)'이라는 단어에 미쳐 있었습니다. "신규 고객 유치 비용(CAC)은 기존 고객 유지 비용보다 5배 비싸다"라는 경영학 원론의 문구를 금과옥조처럼 여겼죠. 그래서 우리 팀은 소위 '돈 되는' 엔터프라이즈 고객, 즉 우리 서비스의 헤비 유저들에게 모든 개발 리소스를 쏟아부었습니다.

그들의 요구사항은 곧장 제품 로드맵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붙이느라 밤을 새웠고, 그들이 만족하면 우리는 안전하다고 믿었습니다. 매출 그래프는 우상향했고, 이탈률은 제로에 수렴했으니까요. 우리는 우리가 테니스 코트의 '왕'을 모시는 시종들이라고 생각하며 뿌듯해했습니다.

하지만 그 안정감이 사실은 서서히 끓어오르는 가마솥인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느 날 재무제표를 뜯어보다가 섬뜩한 지표를 발견했습니다. 신규 유료 전환율이 바닥을 치고 있었던 겁니다. 원인은 간단했습니다. 기존의 '왕'들, 즉 고인물 고객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기능을 덕지덕지 붙이다 보니, 우리 솔루션은 이제 막 사업을 시작한 초기 스타트업이나 중소형 고객이 쓰기엔 너무 비싸고, 너무 복잡하고, 너무 무거운 괴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나이 든 테니스 선수들이 계속 상위권을 독식하는 현상과 똑같았습니다. 승자 독식 구조에서 상위 랭커들은 더 많은 상금을 받고, 더 좋은 코치와 장비를 쓰며 진입 장벽을 높입니다. 그 결과 새로운 선수는 그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도태됩니다. 테니스 판 전체가 '그들만의 리그'로 굳어지면, 결국 관중은 떠나고 생태계는 말라 죽습니다.

우리 서비스가 딱 그 꼴이었습니다. 거액을 지불하는 소수의 VIP 고객(King)들이 시스템을 지배하고 있었고, 우리는 그들의 입맛에 맞추느라 정작 우리 생태계를 활기차게 만들어줄 신규 유입(Fresh Blood)을 스스로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Raph Koster의 글을 읽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습니다. "시스템이 왕들을 정기적으로 제거하지 않으면, 결국 그 왕들과 구성원 모두가 파괴된다."

안정성이야말로 스타트업의 가장 큰 적이었습니다. 서버를 지배하는 거대 길드가 게임을 망치듯, 특정 고객군의 매출 비중이 과도하게 높은 구조는 우리 비즈니스의 혁신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객 중심'이라는 핑계로 모니터 뒤에 숨어, 당장 통장에 꽂히는 돈의 달콤함에 취해 생태계의 순환을 막고 있었던 겁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아픈 결단을 내렸습니다. 엔터프라이즈 고객들이 그토록 원하던 복잡한 기능 개발을 중단했습니다. 대신, 기능을 덜어내고 가격을 낮춘 '라이트 요금제'를 신설했습니다. VIP 고객사 담당자들의 항의 전화를 직접 받으며 식은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당장의 객단가(ARPU)는 떨어졌고, 매출은 출렁였습니다. 개발팀은 "이 기능이 없으면 큰 고객 다 떠난다"며 불안해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왕 살해(Kingslayer)' 전략이 우리를 살렸습니다. 진입 장벽이 낮아지자 새로운 고객들이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서비스에 새로운 피를 수혈했고,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제품을 사용하며 우리에게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었습니다.

시스템의 생존을 위해서는 적절한 수준의 '불평등'은 필요하지만, 과도한 독점은 필연적으로 멸망을 부릅니다. 테니스든, 게임이든, B2B SaaS든 마찬가지입니다. 안정적인 수익원에 안주하는 순간, 혁신은 멈추고 우리는 늙어갑니다.

지금 당신의 제품을 들여다보세요. 혹시 소수의 '왕'들만 즐길 수 있는 그들만의 궁전을 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견고한 성벽이, 사실은 당신의 비즈니스를 고립시키는 감옥일지도 모릅니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판을 흔들고, 1등을 끌어내려야만 모두가 살 수 있습니다.

오늘도 묻고 싶습니다. 당신의 서비스는 새로운 플레이어가 들어와 뛰어놀 수 있는 운동장입니까, 아니면 늙은 챔피언들만 앉아 있는 양로원입니까?

이도현
이도현B2B SaaS 창업자 & CEO

"매출이 발생하지 않는 혁신은 그저 값비싼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LG CNS의 엔터프라이즈 감각과 토스(Toss)의 야생성을 거쳐, 현재는 B2B SaaS 정글에서 생존을 증명하고 있는 실전형 창업가입니다. '돈이 되는 프로덕트'를 만드는 처절한 노하우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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