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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의 CEO가 1936년 초판본을 다시 꺼내 든 이유

AI 시대의 CEO가 1936년 초판본을 다시 꺼내 든 이유

이도현·2026년 1월 3일·3

기술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던 창업자가 조직의 문제를 마주하며 깨달은 인간 본성의 중요성, 그리고 데일 카네기의 1936년 미개정판에서 찾은 비즈니스의 본질에 대하여.

스타트업 초기, 저는 모든 문제를 코드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서버가 다운되면 증설하면 되고, 기능이 부족하면 개발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회사가 시리즈 B를 넘어가고 조직 규모가 50명을 돌파하는 순간, 저를 잠 못 들게 하는 건 기술 부채가 아니라 '사람 문제'였습니다. 핵심 인재의 이탈, 부서 간의 알력 다툼, 그리고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클라이언트의 변심 같은 것들 말입니다.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다루는 비즈니스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OS는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요. 그리고 이 OS는 지난 수천 년간 업데이트되지 않았습니다.

최근 우연히 데일 카네기의 고전, <친구를 얻고 사람을 움직이는 법(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의 '미개정판(Unrevised Version)'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시중에 유통되는 현대판이 아닌, 1936년 원작 그대로의 텍스트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미개정판을 호스팅하는 운영자는 현대의 수정판들이 "정치적 올바름(PC)과 시대적 감수성을 이유로 원작의 날카로움을 무디게 만들었다"고 지적합니다. 심지어 오늘날 대부분의 판본에서는 파트 5와 파트 6가 통째로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저는 이 지점에서 묘한 호기심과 함께, 우리가 '세련됨'을 핑계로 본질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B2B SaaS를 운영하다 보면 매일같이 치열한 설득의 현장에 놓입니다. 우리 솔루션의 기술적 우위를 증명해야 하고, 경쟁사보다 비싼 이유를 납득시켜야 하죠. 미개정판의 파트 3, '상대방을 당신의 생각으로 끌어들이는 열두 가지 방법'은 현대의 세일즈 플레이북보다 훨씬 본질적입니다. "논쟁에서 이기는 방법은 논쟁을 피하는 것뿐이다"라는 구절은, 기능 명세서를 들이밀며 고객의 요구사항을 반박하던 저의 지난날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만들었습니다. 고객은 논리적인 승패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충이 이해받기를 원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기술 창업가들은 종종 망각합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현대판에서 삭제된 파트 6, '가정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일곱 가지 규칙'입니다. 비즈니스 서적에 웬 가정사냐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창업자의 번아웃은 대부분 회사 밖에서 시작됩니다. 일과 삶의 균형이 무너지고 가정의 불화가 시작되면, 아무리 뛰어난 CEO라도 온전한 판단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카네기의 원작은 이 부분을 비즈니스 스킬만큼이나 중요하게 다뤘습니다. "결혼의 무덤을 가장 빠르게 파는 방법" 같은 직설적인 챕터 제목은, 워라밸이라는 모호한 단어보다 훨씬 더 적나라하게 우리의 삶을 타격합니다.

편집되지 않은 원작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비즈니스 현장은 교과서처럼 정제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감정은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거칠며, 편향되어 있습니다. 후대의 편집자들은 카네기의 예시가 너무 남성 중심적이거나 구시대적이라며 다듬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날것'의 예시들이야말로 인간의 밑바닥 본성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우리는 JIRA 티켓을 처리하듯 사람을 대할 수 없습니다. 레거시 코드처럼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의 맥락을 이해하려면, 필터링 되지 않은 원본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조직 관리 측면에서도 파트 4의 '기분 상하게 하지 않고 사람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지금의 팀장급 리더들에게 필수적인 가이드라인입니다. "명령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는 원칙은 자율성을 중시하는 요즘 개발 문화를 관통합니다. 저는 최근 코드 리뷰나 성과 면담에서 지시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 화법을 바꿨습니다. "이 코드는 비효율적입니다"라고 지적하는 대신, "이 부분에서 리소스 사용량을 줄일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라고 묻는 것이죠.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팀원들은 방어기제를 내리고 스스로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왔습니다.

결국 AI가 코드를 짜고 마케팅 문구를 생성하는 시대에도, 클로징을 만들어내고 팀을 하나로 묶는 것은 인간의 몫입니다. 기술은 계속 변하지만, 인간 본성이라는 상수는 변하지 않습니다. 화려한 최신 경영 이론서도 좋지만, 가끔은 1936년의 투박하지만 진실된 원칙으로 돌아가 보시기를 권합니다. 누군가에 의해 보기 좋게 다듬어진 요약본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미개정판' 원문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 속에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난제의 해답이 숨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도현
이도현B2B SaaS 창업자 & CEO

"매출이 발생하지 않는 혁신은 그저 값비싼 취미생활일 뿐입니다." LG CNS의 엔터프라이즈 감각과 토스(Toss)의 야생성을 거쳐, 현재는 B2B SaaS 정글에서 생존을 증명하고 있는 실전형 창업가입니다. '돈이 되는 프로덕트'를 만드는 처절한 노하우를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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