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프트웨어 개발자로서 우리는 '롤백'이나 '핫픽스'라는 안전장치에 익숙합니다. 코드가 잘못되면 서버를 이전 버전으로 되돌리거나 긴급 패치를 배포하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하드웨어의 세계는 잔인하리만큼 냉정합니다. PCB(인쇄 회로 기판)를 설계해서 공장으로 보낸 뒤, 사소한 핀 연결 실수 하나가 발견되면 그 대가는 혹독합니다. 수천 달러의 비용은 물론이고, 다시 설계를 수정하고 제작하여 배송받기까지 최소 2주에서 한 달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허공에 날려야 합니다. CTO로서 수많은 하드웨어 프로젝트를 지켜보며 느낀 건, 이 '재작업(Respin)' 비용이야말로 스타트업의 자금줄을 마르게 하는 가장 큰 위협이라는 점입니다.
기존의 하드웨어 설계 툴(EDA)에는 ERC(Electrical Rule Check)나 DRC(Design Rule Check) 같은 검증 기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지극히 기계적인 규칙만 검사합니다. 예를 들어 "이 선이 저 선과 연결되어 있는가?"는 확인해 주지만, "이 3.3V 센서가 5V MCU 핀에 연결되어도 안전한가?" 혹은 "이 통신 핀이 데이터시트에서 권장하는 풀업 저항 값을 지켰는가?" 같은 논리적이고 맥락적인 오류는 잡아내지 못합니다. 결국 엔지니어는 수십 장의 데이터시트를 화면에 띄워놓고 밤을 새워가며 눈으로 검사해야 했습니다. 피로가 누적된 인간은 반드시 실수를 하기 마련이고, 그 실수는 곧 비용으로 직결됩니다.
최근 'Traceformer'라는 도구가 대규모 업데이트를 발표하며 이 문제에 흥미로운 기술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AI에게 회로도를 보여주고 오류를 찾아라"라고 명령하는 1차원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이들이 구축한 시스템은 LLM을 활용한 멀티 에이전트(Multi-Agent) 파이프라인의 정석을 보여줍니다.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I를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에 대한 훌륭한 레퍼런스가 될 수 있기에, 하드웨어 엔지니어뿐만 아니라 시스템 아키트들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스템의 핵심은 '계획(Planner)', '작업자(Workers)', '통합자(Merger)'로 이어지는 3단계 오케스트레이션입니다. 먼저 Planner는 KiCad나 Altium으로 작성된 넷리스트(Netlist)를 파싱하여 전원부, 통신부, 센서부 등 하위 시스템을 식별하고 작업 지시서를 만듭니다. 그 후 최대 10개의 Worker 에이전트가 병렬로 실행되며 각자 맡은 파트의 데이터시트를 검색하고 사양을 분석합니다. 마지막으로 Merger가 이 모든 증거를 수집하여 오류인지, 경고인지, 혹은 정보가 부족한지를 판단해 구조화된 리포트를 생성합니다.
이러한 아키텍처가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비용과 속도의 최적화입니다. 거대한 문맥(Context)을 하나의 모델에 전부 밀어 넣으면 토큰 비용이 폭발하고 처리 속도가 느려집니다. 하지만 Traceformer처럼 작업을 잘게 쪼개어(Decomposition) 병렬 처리하면 훨씬 저렴하고 빠르게, 그러면서도 더 깊이 있는 검증이 가능합니다. 둘째, 환각(Hallucination) 현상의 최소화입니다. 이 도구는 단순히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특정 데이터시트의 페이지를 근거로 제시해야만 오류로 인정합니다. 근거를 찾지 못하면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정보 누락(Missing Info)'으로 분류하여 인간의 개입을 유도합니다. 이는 AI를 실무에 적용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할 '신뢰성 설계'의 모범답안입니다.
물론 이 도구가 기존의 ERC나 시뮬레이션을 완벽히 대체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리적인 연결성이나 신호 무결성 시뮬레이션은 여전히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하지만 Traceformer는 인간이 가장 취약한 영역, 즉 '방대한 문서 대조 작업'을 자동화해 줍니다. 월 20달러 수준의 프로 요금제로 수백만 원짜리 재설계 사고를 한 번이라도 막을 수 있다면, 그 ROI(투자 대비 수익)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명확합니다.
우리는 이제 AI가 코드를 짜주는 시대를 넘어, 하드웨어 설계의 논리적 결함까지 검증해 주는 시대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엔지니어의 역할은 데이터시트를 한 줄 한 줄 읽는 것에서, AI가 찾아낸 잠재적 위험 요소를 최종 판단하는 결정권자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막막했던 하드웨어 디버깅의 과정에 강력한 동료가 생긴 셈입니다. 기술이 주는 혜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불필요한 밤샘과 재설계의 공포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설계의 가치에 집중하시길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