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설계를 고집하다 3개월치 코드를 전부 지우고 깨달은 것

완벽한 설계를 고집하다 3개월치 코드를 전부 지우고 깨달은 것

박준혁·2026년 1월 13일·3

완벽한 설계를 고집하다 3개월치 코드를 지우며 깨달은 점. 코드는 대리석이 아니라 젖은 점토와 같으며,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철학을 전공했던 대학 시절, 저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심취해 있었습니다. 세상 어딘가에는 변하지 않는 완벽한 본질이 존재하다고 믿었죠. 그 버릇을 못 버리고 개발판에 뛰어들었을 때, 저는 코드를 마치 대리석 조각처럼 다뤘습니다. 한 번 깎으면 돌이킬 수 없고, 영원히 남을 예술작품처럼 말입니다.

그게 얼마나 오만한 착각이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첫 직장이었던 웹 에이전시에서 월급이 밀려가며 야근하던 시절, 저는 완벽한 아키텍처에 집착했습니다. 클린 코드 책에서 본 대로 인터페이스를 분리하고, 변수명 하나에 30분을 고민했습니다. 하지만 고객사의 요구사항은 점심 먹고 들어오면 바뀌어 있었습니다. "여기 버튼 위치 좀 바꿔주세요"라는 말 한마디에 제가 공들여 쌓은 '대리석 조각'은 와르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때 느꼈던 좌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코드가 내 자식 같았거든요. 수정 요청이 들어오면 마치 내 자식을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어 방어적으로 굴었습니다. "기술적으로 그건 구조를 해치는 일입니다"라고 말대꾸를 하기도 했죠.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러운 일입니다. 비즈니스는 전쟁터인데, 혼자 예술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최근 흥미로운 글을 하나 읽었습니다. '코드는 점토(Clay)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도예 수업에서 남들은 쓸모 있는 머그잔이나 그릇을 만드는데, 저자는 '하이퍼큐브(4차원 입방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강사는 실망했지만, 그는 그 과정에서 깨달음을 얻습니다. 점토는 굽기 전까지는 계속 움직이고, 반응하고, 무너집니다. 중심을 잡으려다 전체가 찌그러지기도 하죠. 하지만 망가지면 그냥 뭉쳐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코드도 정확히 똑같습니다. 기능 하나 추가하면 버그가 두 개 생깁니다. 리팩터링한다고 건드렸다가 운영 서버를 터뜨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겁니다. 코드는 대리석이 아니라 젖은 진흙 덩어리니까요. 마음에 안 들면 `git reset`을 때리거나, 파일을 통째로 날리고 다시 짜면 그만입니다.

많은 주니어 개발자들이 코드에 과한 애정을 쏟습니다. 특히 명문대 나온 똑똑한 친구들일수록 자신이 짠 로직에 심취해, 더러운 코드를 참지 못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짜는 코드의 90%는 그냥 텍스트 덩어리일 뿐입니다. 신성하지 않습니다. 구현체는 사라져도 비즈니스 로직과 아이디어는 남습니다.

이제는 상황이 더 재밌어졌습니다. 소위 '코드의 산업혁명'이 시작됐거든요.

예전에는 접시 하나, 머그잔 하나를 장인이 손으로 빚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공장에서 찍어냅니다. 우리 개발자들의 현실도 비슷합니다. Cursor나 Claude 같은 AI 도구들이 CRUD 보일러플레이트 코드를 순식간에 뱉어냅니다. 이걸 두고 "개발자의 종말"이라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도자기가 공장에서 찍혀 나온다고 해서 도예가가 사라졌나요? 아닙니다. 오히려 손으로 빚은 도자기의 가치는 더 올라갔습니다. 단순한 '그릇(기능)'은 기계가 만들고, 인간은 그 위에 '공예(Craft)'를 더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요즘은 단순 반복 코딩은 AI에게 맡깁니다. 대신 저는 시스템의 전체적인 흐름, 비즈니스의 병목 지점, 그리고 남들은 생각지 못한 기괴한 엣지 케이스들을 고민합니다. 기계가 매끈한 머그잔을 만드는 동안, 저는 삐뚤빼뚤하더라도 독창적인 '하이퍼큐브'를 빚는 셈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AI가 아니라, 자신의 코드에 대한 쓸데없는 집착입니다. 코드를 끌어안고 끙끙대지 마십시오. 망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과감하게 부수고 다시 빚으십시오. 어차피 코드는 수단일 뿐이고, 우리가 진짜로 만들어야 할 것은 고객에게 전달되는 가치니까요.

오늘 당신이 작성한 코드는 박물관에 전시될 조각상이 아닙니다. 언제든 다시 뭉개고 새로 빚을 수 있는 점토 덩어리입니다. 그러니 어깨에 힘 좀 빼고, 좀 더 과감하게 저질러도 괜찮습니다.

당신은 지금 공장에서 찍어낼 법한 뻔한 머그잔을 만들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만의 하이퍼큐브를 빚고 있습니까?

박준혁
박준혁그로스 엔지니어링 리드

지방대 철학과, 국비지원 출신. 첫 연봉 1,800만 원에서 시작해 유니콘 기업 리드가 되기까지. 코딩 재능은 없지만 생존 본능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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