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해, 지난 몇 년간 CES는 엔지니어들에게 고문이었습니다. 칫솔부터 바비큐 그릴까지 모든 제품에 'AI' 딱지를 붙여대니, 정작 기술의 본질인 하드웨어 스펙이나 아키텍처는 뒷전으로 밀려났으니까요. "이게 왜 AI가 필요한가요?"라고 물으면 마케팅 용어만 돌아오는 현실에 피로감을 느낀 건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이번 CES 2026에서 델(Dell)이 보여준 행보는 엔지니어로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했습니다. 그들은 지난 5년 중 가장 '비-AI(Un-AI)'적인 브리핑을 했습니다. 화려한 버즈워드 대신, 투박하지만 확실한 '성능'과 '스펙'을 들고나온 겁니다.
이 현상은 단순한 기업 전략의 변화가 아닙니다. 시장이, 그리고 유저가 더 이상 'AI'라는 단어만으로는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냉혹한 신호입니다. 오늘은 이 변화 속에서 우리 개발자와 기획자가 허상 쫓기를 멈추고, 살아남기 위해 당장 적용해야 할 실질적인 전략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작년에는 우리가 모두 AI PC에 관한 것이었는데 약간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 소비자는 AI를 기반으로 구매하지 않습니다." - Kevin Terwilliger, Dell 제품 책임자
1. 'AI First'라는 강박 버리기: 기술은 도구일 뿐입니다
지난 1년, 우리는 목적 없는 AI 도입으로 얼마나 많은 리소스를 낭비했습니까? 델의 임원 제프 클라크(Jeff Clarke)는 이번 브리핑에서 "충족되지 않은 AI에 대한 약속(un-met promise of AI)"을 언급했습니다. 뼈 때리는 말입니다.
엔지니어링의 관점에서 AI는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어야 합니다.
The Mistake (기존의 실수): 기획 단계에서 "여기에 AI 기능 뭐 넣을 수 있어?"부터 시작함. 결과적으로 Latency(지연 시간)는 늘어지고, TCO(총 소유 비용)는 폭증하며, 유저는 "그래서 이게 뭐가 좋은데?"라고 반문하는 기능이 탄생함.
The Fix (생존 전략): 'AI 기능'을 세일즈 포인트로 잡지 마십시오. 대신 AI를 통해 개선된 구체적인 지표(Metric)를 내세워야 합니다.
- 나쁜 예: "AI 기반의 스마트한 메모리 관리 시스템"
- 좋은 예: "메모리 누수 탐지 속도 40% 향상 및 시스템 크래시 90% 감소"
유저는 당신의 제품 안에 LLM이 들어있는지, 단순한 if-else 구문이 들어있는지 관심 없습니다. 그저 내 노트북이 안 멈추고 빨리 돌아가길 바랄 뿐입니다.
2. 하드웨어와 기본기(Fundamentals)에 집착하십시오
델은 이번 발표에서 AI 대신 '메모리 부족', '발열 제어', '폼팩터 최적화'를 이야기했습니다. 화려한 소프트웨어 뒤에 숨겨진 하드웨어의 한계를 직시한 겁니다.
소프트웨어 개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거운 라이브러리와 API를 덕지덕지 붙여 구현한 기능은, 결국 인프라 비용과 유지보수 난이도라는 부채로 돌아옵니다.
Action Item: 지금 당장 팀 내부 회의에서 '모델의 성능'보다 '인퍼런스 비용(Inference Cost)'과 '응답 속도'를 먼저 논의 테이블에 올리십시오.
- NPU(신경망 처리 장치)가 탑재되었다고 자랑할 게 아니라, 그 NPU를 통해 CPU 부하를 얼마나 줄였는지 수치로 증명하십시오.
- 델이 XPS와 에일리언웨어(Alienware) 라인업에서 보여준 것처럼, 소비자가 체감할 수 있는 '물리적 가치'(배터리 시간, 프레임 방어율)에 집중하십시오.
3. 유저를 '혼란'시키지 말고 '해결'해주십시오
델의 제품 책임자는 "AI가 특정 결과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보다, 오히려 혼란을 주는 경우가 많다"고 인정했습니다. 개발자로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챗봇이 엉뚱한 대답을 내놓을 때마다 유저 경험(UX)은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Survival Routine: 설익은 AI 기능을 베타 딱지 붙여 내놓는 것을 멈추십시오. '신기함'을 파는 시기는 지났습니다. 이제는 '신뢰성'을 팔아야 합니다.
- Determinism (결정론적 결과): AI가 개입하더라도, 유저가 예측 가능한 범위 내에서 결과가 나와야 합니다.
- Fallback 시나리오: AI 모델이 실패했을 때, 혹은 네트워크가 끊겼을 때 기존 로직으로 얼마나 부드럽게 전환되는지(Graceful Degradation)가 엔지니어의 실력입니다.
결론: 엔지니어링의 본질로 돌아갈 시간
델의 이번 발표는 지난 몇 년간의 'AI 광풍'에 대한 해독제와 같습니다. 마케팅 용어가 걷히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누가 더 효율적으로, 더 적은 비용으로, 더 정확하게 문제를 해결했는가'입니다.
새벽 3시에 장애가 터졌을 때 서버를 살리는 건 화려한 마케팅 문구가 아니라, 견고하게 짜인 아키텍처와 최적화된 코드입니다. AI라는 단어 뒤에 숨지 마십시오. 이제 다시, 진짜 엔지니어링으로 승부할 때가 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