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주니어들 면접을 보다 보면 한숨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pip install 하다가 에러 한 줄만 뜨면 세상이 무너진 표정을 짓더군요.
CUDA 버전 안 맞는다고, 라이브러리 호환성 안 맞는다고 징징댑니다.
솔직히 말해서, 배부른 소리입니다.
진짜 지옥은 하드웨어 아키텍처(Architecture) 자체가 바뀔 때 시작되니까요.
오늘 이야기할 문건은 1994년, 실리콘밸리의 전설적인 '삽질'이자 혁신의 기록입니다.
바로 스티브 잡스의 NeXTSTEP을 HP의 PA-RISC 칩에 이식하려던 시도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맥북에서 쓰는 macOS의 조상, 그게 바로 NeXTSTEP입니다.
원래는 모토로라 68k 칩셋(CISC) 기반의 '블랙 하드웨어'에서만 돌아갔죠.
그런데 90년대 초반, NeXT가 하드웨어 사업을 접습니다.
살아남으려면 OS를 다른 하드웨어에 팔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게 당시 워크스테이션계의 람보르기니, HP 9000 시리즈였습니다.
여기에 들어간 CPU가 바로 PA-RISC(PA-7100)입니다.
CISC에서 RISC로의 전환.
이건 단순히 코드를 복사해서 붙여넣는 수준이 아닙니다.
Instruction Set(명령어 집합) 자체가 다른 외계어 수준의 통역이 필요하죠.
당시 엔지니어들이 겪었을 고통, 상상이 가시나요?
문서를 보면 HP 9000 712(일명 피자박스), 735, 755 모델을 지원했다고 나옵니다.
특히 HP 9000 735/125 모델.
이 녀석은 당대 가장 빠른 RISC 워크스테이션 중 하나였습니다.
Latency? Throughput?
지금 기준으로도 깡통 성능만 보면 기가 막힌 수준의 최적화였습니다.
HP의 무식할 정도로 강력한 연산 능력에, NeXT의 Mach 마이크로커널(Microkernel)이 올라간 겁니다.
이론상으로는 완벽한 결합이었죠.
산업용 트랙터 엔진에 롤스로이스의 인테리어를 얹은 격이니까요.
그런데 결과는 어땠을까요?
처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TCO(Total Cost of Ownership, 총 소유 비용) 관점에서의 실패였죠.
하드웨어 스펙은 깡패였지만, 소프트웨어 생태계가 전멸이었습니다.
문서에 따르면 FrameMaker 같은 일부 DTP 툴만 간신히 포팅되었습니다.
SoftPC 같은 에뮬레이터도 있었지만, 네이티브 성능을 100%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개발자들은 열광했지만, 정작 물건을 사줄 기업들은 외면했습니다.

이 사례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뭘까요?
요즘 AI 씬을 보면 똑같은 역사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엔비디아 GPU가 비싸다고 온갖 스타트업들이 NPU를 찍어냅니다.
스펙 시트만 보면 TOPS(초당 테라 연산) 수치는 화려하죠.
하지만 정작 컴파일러(Compiler)가 엉망이거나, PyTorch 지원이 반쪽짜리입니다.
하드웨어가 아무리 빨라도, 그 위에서 돌릴 소프트웨어 스택이 없으면 그냥 비싼 고철 덩어리입니다.
1994년의 HP와 NeXT도 그랬습니다.
온보드 그래픽, SCSI 컨트롤러까지 야무지게 지원했지만, 결국 '생태계'를 구축하지 못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이 실패가 무의미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이때 RISC 아키텍처로 포팅하며 쌓인 하드웨어 추상화 계층(HAL)에 대한 노하우.
그게 나중에 애플이 인텔 맥으로, 그리고 지금의 Apple Silicon(M시리즈)으로 넘어가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당시 개발자들이 밤새 디버깅하며 흘린 피와 땀이 지금 여러분의 맥북 M3 칩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뜻입니다.
개발자라면 '돌아가는 코드'에 안주하지 마세요.
그 코드가 어떤 실리콘 위에서, 어떤 레이턴시로, 어떻게 메모리를 갉아먹으며 돌아가는지 집요하게 파고드세요.
1994년의 그들처럼, 하드웨어의 바닥까지 긁어본 경험만이 여러분을 대체 불가능한 엔지니어로 만듭니다.
오늘 밤엔 화려한 프레임워크 문서는 덮어두고, 리눅스 커널 코드나 한 줄 더 까보시길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