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해, 처음 그 기사를 봤을 때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또 CES용 뜬구름 잡는 소리가 나왔구나" 싶었거든요. 개발자로 8년을 구르다 보니 생긴 건 뱃살과 냉소뿐이라, '혁신'이니 '세계 최초'니 하는 수식어만 보면 본능적으로 방어기제부터 작동합니다. 마치 기획팀에서 "이 기능은 간단해서 금방 되죠?"라고 물어올 때의 그 싸늘한 느낌처럼요.
그런데 Donut Lab의 전고체 배터리 기사를 정독하다가, 타자를 치던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건 단순한 POC(개념 증명) 수준이 아니더군요. 2026년 1분기, 그러니까 당장 다음 분기에 양산차에 탑재되어 도로를 달린답니다. 충전 5분, 에너지 밀도 400Wh/kg, 영하 30도에서도 성능 저하 없음. 우리가 흔히 소프트웨어 공학에서 말하는 '은탄환(Silver Bullet)'은 없다는 격언을 비웃기라도 하듯, 하드웨어 세상에 진짜 괴물이 등판해버린 겁니다.
이 소식을 접하며 문득, 스타트업 시절 저지른 뼈아픈 실수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저는 3년 차 주니어였고, '기술 뽕'에 잔뜩 취해 있었습니다. 안정적으로 잘 돌아가던 레거시 모놀리식 서버를 굳이 MSA(마이크로 서비스 아키텍처)로 뜯어고치겠다고 고집을 피웠죠. 트래픽이 많지도 않은 서비스에 쿠버네티스를 도입하고, 온갖 최신 라이브러리를 덕지덕지 발랐습니다. 그게 '혁신'이고 '미래'라고 믿었으니까요.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배포 복잡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운영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장애 대응은 불가능에 가까웠습니다. 결국 금요일 밤 11시, DB 데드락으로 서비스가 셧다운 되었을 때 식은땀을 흘리며 깨달았습니다. "준비되지 않은 혁신은 재앙이구나." 기술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감당할 수 있는 '프로덕션 레벨'의 준비가 핵심이라는 걸 그때 500만 원짜리 AWS 요금 고지서와 함께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번 Donut Lab의 발표가 충격적인 건 바로 그 지점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실험실에서 성공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OEM 양산 차량에 즉시 전력 공급 가능"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가 흔히 겪는 '로컬에서는 잘 되는데요?'의 수준을 넘어, 리얼 월드의 트래픽을 받아낼 준비를 끝냈다는 뜻입니다.
심지어 그들이 해결했다는 문제들을 보면 개발자로서 질투가 날 지경입니다. 덴드라이트(Dendrite) 없음, 화재 위험 없음. 이건 마치 우리가 코드 짤 때 메모리 누수도 없고, 스레드 세이프(Thread-safe) 하면서, 성능은 2배 빠른데 리소스는 절반만 먹는 로직을 구현한 것과 같습니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트레이드오프(Trade-off)의 법칙을 깨버린 겁니다.
대기업으로 이직해 체계적인 시스템 안에서 일하고 있는 지금도, 저는 여전히 새로운 기술이 두렵습니다. 최근 Cursor나 Claude 같은 AI 코딩 도구들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내 밥줄은 괜찮을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전고체 배터리 뉴스를 보며 느낀 감정도 비슷했습니다. 기존의 리튬이온 배터리 생태계에 있던 엔지니어들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요?
하지만 Donut Lab의 CEO Marko Lehtimäki의 말에서 힌트를 얻습니다. "미래는 언제 현실이 되느냐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오늘'입니다."
우리는 변화를 막을 수 없습니다. 제가 스타트업 시절 MSA 도입에 실패했던 건 기술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 기술을 비즈니스 가치로 연결할 '맥락'과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반면 Donut Lab은 Verge Motorcycles 같은 파트너사와 함께 실제 도로 위에서 증명해내고 있습니다. 기술을 기술로만 남겨두지 않고, 생태계(Platform)를 만들어낸 것이죠.
이제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던 기술들이 어느 날 갑자기 `git push` 되어 프로덕션에 배포되는 세상입니다. AI가 코드를 짜주고, 배터리가 5분 만에 충전되는 시대에 개발자인 제가 할 일은 냉소가 아니라 적응이라는 것을요.
"이건 말도 안 돼"라고 투덜거리며 레거시 코드를 붙잡고 있기보다, "이 압도적인 효율성을 내 서비스에 어떻게 녹여낼까?"를 고민해야겠습니다. 8년 차가 되었다고 해서 경험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변화를 거부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오늘 밤은 꽤나 부끄럽고도 설레는 마음으로 잠들 것 같습니다.
혹시 지금 너무 빠른 기술 변화에 현기증을 느끼는 주니어 분들이 있다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같은 '고인물'들도 똑같이 두렵고 막막합니다. 다만, 그 두려움을 호기심으로 바꾸는 사람이 결국 살아남는다는 걸, 저도 매일 배우고 있을 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