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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드 한 줄에 담은 낭만: HTTP 헤더로 전하는 추모

코드 한 줄에 담은 낭만: HTTP 헤더로 전하는 추모

김현수·2026년 1월 3일·3

기술적 효용성은 없지만 엔지니어링의 낭만을 보여주는 'X-Clacks-Overhead' HTTP 헤더를 통해 코드 속에 담긴 추모의 의미와 개발자의 감성을 이야기합니다.

요즘 들어 부쩍 "개발자가 갖춰야 할 소양"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게 됩니다. 효율성, 클린 코드, 아키텍처, 성능 최적화… 물론 다 중요한 이야기죠. 저 역시 10년 넘게 이 바닥에서 구르다 보니, 새로 들어온 후배들에게 자꾸만 이런 '기술적인 정답'을 강요하게 되더군요. "이건 리소스 낭비예요", "이건 트래픽 관점에서 좋지 않아요"라면서요. 그런데 며칠 전, 우연히 마주친 작은 HTTP 헤더 하나가 제 삭막해진 머리를 뎅 하고 때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기술적 효용성 따위는 전혀 없지만, 그 어떤 기능보다 엔지니어링의 낭만을 보여주는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웹사이트의 HTTP 응답 헤더를 까보신 적이 있나요? 보통은 디버깅할 때나 Cache-Control이나 CORS 설정이 제대로 먹혔는지 확인하려고 들여다보죠. 저도 여느 때처럼 브라우저 개발자 도구를 열고 네트워크 탭을 뒤적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낯선 이름의 헤더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X-Clacks-Overhead: GNU Terry Pratchett

처음엔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무슨 새로운 보안 프로토콜인가? 아니면 내가 모르는 프레임워크의 메타데이터인가? 알고 보니 이건 영국의 유명한 판타지 소설가, 테리 프래쳇(Terry Pratchett)을 기리기 위한 전 세계 개발자들의 조용한 약속이었습니다.

테리 프래쳇의 소설 《Going Postal》에는 '클랙스(Clacks)'라는 통신 시스템이 나옵니다. 빛을 이용해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종의 광통신이나 인터넷의 원시적인 형태죠. 이 소설 속 세계관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하나 있습니다. 누군가의 이름이 클랙스 타워를 통해 계속 오르내리는 한, 그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여기서 'GNU'는 리눅스 진영의 그 GNU가 아닙니다. 소설 속 통신 프로토콜 코드로, G는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라는 뜻, N은 로그를 남기지 말라는 뜻, U는 라인의 끝에 도달하면 다시 돌아오게 하라는 뜻입니다. 즉, "테리 프래쳇의 이름을 영원히 네트워크 속에서 순환시켜라"라는 의미인 셈이죠.

이 사실을 알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봤습니다. 테리 프래쳇이 세상을 떠난 지 꽤 되었지만, 수많은 서버 관리자와 웹 개발자들이 자신의 서버 설정 파일에 이 한 줄을 추가함으로써 그를 추모하고 있었던 겁니다.

기술적으로 보자면, 이건 '쓰레기 데이터'입니다. 브라우저는 이 헤더를 해석하지 않고, 사용자는 눈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아주 미세하지만 트래픽을 잡아먹는 바이트 낭비일 수도 있죠. 예전의 저였다면 "쓸데없는 헤더는 지우세요"라고 코드 리뷰를 남겼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헤더를 보는 순간,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망이 단순히 0과 1이 오가는 차가운 기계 덩어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네트워크를 만들고 유지하는 건 결국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니까요.

저도 이 낭만에 동참해 보기로 했습니다. 제 블로그는 Cloudflare Pages를 사용하고 있는데, 설정은 생각보다 훨씬 간단했습니다. 루트 디렉터리에 _headers라는 파일을 만들고 딱 몇 줄만 적어주면 되더군요.

/* 
X-Clacks-Overhead: GNU Terry Pratchett
*/

이게 전부입니다. 이제 제 블로그의 모든 HTML 요청과 정적 자산에는 이 헤더가 붙어서 나갑니다. curl -I 명령어로 제 사이트를 찔러보면, 서버는 묵묵히 "GNU Terry Pratchett"이라고 응답하겠죠. 성능이나 기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검색 엔진 최적화(SEO)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지만 누군가 우연히 개발자 도구를 열었을 때 이 헤더를 발견하고 피식 웃거나, 잠시나마 따뜻함을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개발자로서 늘 '이유 있는 코드'를 짜야 한다고 배웁니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이유 없는 낭만'을 코드 한구석에 숨겨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삭막한 버그 수정과 배포 전쟁 속에서, 우리가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해주는 작은 쉼표가 될 테니까요. 여러분의 서버 설정 파일 한구석에도, 혹은 주석 한 줄에도, 남들은 모르는 여러분만의 소중한 이야기나 추모를 담아보는 건 어떨까요. 인터넷은 생각보다 따뜻한 곳일지도 모릅니다.

김현수
김현수10년 차 시니어 개발자

SI의 척박한 땅에서 시작해 빅테크의 대규모 트래픽까지 경험한 생존형 개발자입니다. '화려한 기술'보다 '퇴근을 보장하는 안정성'을 신봉하며, 주니어들의 삽질을 방지하기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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