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고백하자면, 어제 새벽에 또 사고를 칠 뻔했습니다.
레거시 모놀리식(Monolithic) 시스템을 MSA로 쪼개는 마이그레이션 작업을 하던 중이었는데요.
데이터 정합성을 맞추겠다고 짠 스크립트가 운영 DB 락(Lock)을 걸어버릴 뻔했거든요.
식은땀을 닦으며 모니터를 멍하니 보다가, 문득 입사 초기에 사수 형이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야, 개발자는 코드로 말하는 게 아니라 로그와 문서로 말하는 거야."
그때는 그게 무슨 '꼰대' 같은 소리인가 싶었습니다.
코드만 잘 돌아가면 장땡이지, 무슨 문서 타령인가 했으니까요.
그런데 최근 우연히 발견한 이 사이트를 보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바로 SCiZE's Classic Warez Collection이라는 곳입니다.
처음엔 그냥 불법 복제 소프트웨어(Warez)나 공유하던 어둠의 역사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안을 들여다보니, 90년대 개발자(혹은 해커)들의 기묘한 '장인 정신'이 보이더군요.

이 사이트는 1990년부터 1999년까지, 소위 'BBS 신(Scene)'에서 거래되던 파일 목록을 아카이빙하고 있습니다.
놀라운 건 그들의 규칙입니다.
그저 파일을 훔쳐서 올리는 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릴리스에는 FILE_ID.DIZ나 .NFO 같은 파일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했죠.
이 텍스트 파일 안에는 화려한 ASCII 아트와 함께, 이 프로그램이 무엇인지, 어떻게 실행하는지, 누가 배포했는지가 적혀 있습니다.
지금 제가 다니는 회사는 네임드 대기업입니다.
코드 한 줄을 배포하려 해도 수많은 절차를 거칩니다.
PR(Pull Request) 리뷰, 단위 테스트 커버리지, QA 검수, 보안 감사...
숨이 턱턱 막힐 때가 많습니다.
스타트업 시절, 대표님 몰래 운영 서버에서 vi로 코드를 수정하던 야생의 시절이 그립기도 했죠.
하지만 이 낡은 BBS 아카이브를 보며 깨달았습니다.
심지어 법의 테두리 밖에 있던 그들조차도 '최소한의 문서화'와 '릴리스 표준'을 목숨처럼 지켰다는 사실을요.
그게 바로 .NFO 파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업물을 단순히 '던져놓는' 게 아니라, '작품'으로 취급했습니다.
요즘 우리는 어떤가요?
Cursor나 GitHub Copilot 같은 AI 도구가 코드를 뚝딱 만들어줍니다.
생산성은 엄청나게 올라갔죠.
하지만 그만큼 코드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은 옅어진 것 같습니다.
"AI가 짰으니까 돌아가겠죠."
후배 개발자가 코드 리뷰 시간에 이렇게 말했을 때, 솔직히 좀 아찔했습니다.
90년대의 그들은 텍스트 파일 하나에도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담으려 ASCII 아트를 깎았습니다.
우리는 Swagger 문서 한 줄, 주석 한 줄을 귀찮아하고 있지는 않나요?
이 사이트 운영자인 SCiZE는 말합니다.
"제게는 이 시절이 신(Scene)의 황금기였습니다."
그가 그리워하는 건 불법 파일 자체가 아닐 겁니다.
밤을 새워 무언가에 몰입하고, 서로의 실력을 증명하려 했던 그 '치열한 열정'일 겁니다.
지금 제 모니터엔 복잡한 쿠버네티스(k8s) 대시보드와 슬랙 알림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NFO 파일을 열어보던 그 시절의 두근거림을 간직해야겠습니다.
기술이 발전하고, AI가 코딩을 대신해주는 시대가 와도 변하지 않는 게 있습니다.
결국 시스템을 움직이는 건, 기계적인 코드가 아니라 그 뒤에 숨은 사람의 '집요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퇴근 전에는, 대충 적어뒀던 API 명세서를 다시 한번 꼼꼼히 다듬어야겠습니다.
마치 90년대의 Scener가 되어 .NFO 파일을 작성하는 마음으로 말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