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목
"레거시 코드를 비웃지 마세요. 그 오만함이 당신의 커리어를 끝장낼 수 있습니다."
본문
솔직히 고백하자면, 대기업으로 이직하고 첫 3개월은 매일이 지옥 같았습니다. 스타트업에서 '야생형'으로 구르던 시절, 저는 "돌아가기만 하면 장땡"이라는 마인드로 코드를 찍어냈거든요. 그런데 이곳의 코드 베이스는 거대한 성(Castle) 같았습니다. 온갖 규칙과 컨벤션, 그리고 수십 년 된 레거시들이 뒤엉켜 있었죠. 처음엔 그 낡은 코드들을 보며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아니, 도대체 누가 변수명을 이따위로 지은 거야? 왜 아직도 이런 구닥다리 라이브러리를 쓰지?"
하지만 그건 제 오만이었습니다. 최근 1994년의 ANSI 아트 만화 'Inspector Dangerfuck'에 관한 글을 읽으며, 저는 그때 느꼈던 얼굴 화끈거리는 부끄러움을 다시 마주해야 했습니다.
오늘 소개할 이야기는 1990년대 초반, 캐나다 퀘벡의 한 외로운 소년 'Eerie'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300-baud 모뎀—지금으로 치면 텍스트 한 줄 전송하는 데도 세월이 걸리는 속도—을 통해 BBS(전자 게시판)라는 지하 세계에 접속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펼쳤습니다. 당시 주류였던 미국식 슈퍼히어로(Spawn 같은 근육질 캐릭터) 스타일이 아니라, 유럽식 만화(Tintin)에 영향을 받은 독특한 '카툰풍' ANSI 아트를 그려냈죠.
흥미로운 점은, 후대 사람들이 검증도 없이 그의 작품을 "인터넷 최초의 웹코믹"이라고 잘못 기록했다는 사실입니다. T. Campbell이라는 작가가 책에 그렇게 썼고, 아무도 원본을 확인하지 않은 채 그 주장을 앵무새처럼 받아적었습니다.
개발자로서 이 대목에서 저는 뼈저린 기억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3년 차 때, 팀장님이 반대하던 NoSQL 도입을 "요즘 이게 트렌드고 무조건 빠르다"며 억지로 밀어붙인 적이 있습니다. 제대로 된 벤치마킹이나 데이터 정합성에 대한 검증도 없이, 그저 블로그 몇 개 읽고 얻은 얄팍한 지식이었죠.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데이터 정합성 문제로 일주일 내내 야근하며 복구 스크립트를 짜야 했고, 결국 다시 RDB로 롤백했습니다. Eerie의 작품을 확인도 없이 '최초'라 치켜세운 사람들처럼, 저 역시 기술의 본질은 보지 않고 껍데기만 좇았던 겁니다. 검증 없는 맹신은 결국 기술 부채라는 이자로 돌아옵니다.
Eerie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의 독특한 스타일은 당시 주류였던 '다크하고 진지한' ANSI 아트 씬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회색 피부 캐릭터와 헐렁한 선을 낯설어했죠. 하지만 Eerie는 고립되는 대신,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주류 스타일(음영, 타이트한 크롭)을 연구하고 흡수했습니다. 결국 그는 전설적인 그룹 ACiD에 합류하며 인정받게 됩니다.
이직 후 제가 겪은 '성장통'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스타트업 시절의 저는 제 코드 스타일이 가장 효율적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대기업의 복잡한 시스템 안에서 제 방식은 '협업 불가능한 코드'일 뿐이었습니다. 린트(Lint) 에러가 수십 개씩 뜨고, PR 리뷰에서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코멘트가 달릴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하지만 Eerie가 그랬듯, 저도 적응해야 했습니다. 팀의 컨벤션을 따르고, 레거시 코드가 왜 그렇게 짜였는지 히스토리를 파적했습니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 '답답한' 레거시 코드들이 실은 당시의 트래픽 폭주을 막아낸 영웅적인 코드였다는 사실을요.

우리는 지금 AI가 코드를 짜주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Cursor나 Claude에게 "기능 만들어줘"라고 하면 뚝딱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1994년 Eerie가 픽셀 하나하나를 찍으며 고뇌했던 그 과정, 그리고 그가 지하 세계 커뮤니티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며 성장했던 맥락은 AI가 대체해줄 수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다루고 있는 그 '지저분한' 레거시 코드, 혹은 이해할 수 없는 동료의 설계 방식 뒤에는, 그 당시 치열하게 고민했던 누군가의 '생존기'가 담겨 있습니다. "요즘 기술이 아니니까 틀렸어"라고 단정 짓기 전에, 그 맥락을 한 번만 더 들여다보세요. Eerie가 낯선 BBS 세계에서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했듯, 우리도 기술의 홍수 속에서 휩쓸리지 않고 단단한 자기만의 중심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검증하고, 존중하며, 흡수하십시오. 그것이 8년 동안 구르며 제가 배운 유일한 생존 법칙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