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에 1989년에 쓰인 마크 스티글러의 흥미로운 소설 한 편을 읽었습니다. 개발자로 살아온 지난 10년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야기는 컴퓨터와 미래에 미쳐있는 남자 '잭'과, 자연과 꽃을 사랑하며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한 '여성'의 대화로 시작됩니다. 잭은 눈을 반짝이며 말합니다. "싱귤래리티(Singularity)가 올 거야. 우리는 불멸의 삶을 살게 되고, 나노기술로 소행성을 개조해 집을 짓게 될 거야." 하지만 여성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하죠. "나는 기계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80살, 90살까지만 살다가 자연스럽게 흙으로 돌아가고 싶어."
이 장면을 보며 저의 주니어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새로운 프레임워크가 쏟아져 나오고, 클라우드 네이티브 환경으로의 전환이 화두가 되었을 때, 저는 잭보다는 그 여성에 가까웠습니다. "지금 시스템도 잘 돌아가는데 굳이 왜?" 혹은 "내 손으로 한 줄 한 줄 짜지 않은 코드는 믿을 수 없어"라는 고집이 있었죠. 잭이 말한 '헤드밴드를 끼고 컴퓨터와 대화하는 미래'가 여성에게 끔찍하게 느껴졌듯, 저에게도 AI가 코드를 짜주는 세상은 개발자의 영혼을 파는 행위처럼 느껴졌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하고, 익숙한 현재의 '삽 자루'를 꽉 쥐려고 합니다.
소설 속 시간은 무심하게 흐릅니다. 잭은 자신의 비전을 쫓아 떠났고, 여성은 산속에 남아 가정을 꾸리고 늙어갑니다. 그리고 82세가 된 어느 겨울날, 그녀는 잔혹한 현실과 마주합니다. 남편은 눈사태로 세상을 떠났고, 자식들은 출가했으며, 반려견마저 곁을 떠났습니다. 밖에는 밤새 내린 폭설이 보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한 손에 익숙한 삽을 들고 서 있습니다. 하지만 82세의 노구로 그 엄청난 눈을 다 치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바로 그때, 그녀의 눈에 자식들이 선물해 준 '기계 짐승(제설 로봇)'이 들어옵니다.
개발자로서의 우리 삶에도 반드시 이런 '폭설'의 순간이 찾아옵니다. 서비스의 트래픽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폭주하거나, 레거시 코드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유지보수가 불가능해지는 시점, 혹은 비즈니스의 요구사항이 인간의 물리적 속도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빨라지는 순간 말입니다. 젊은 날의 패기와 체력으로 밤을 새워가며 '삽질'을 하던 방식으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거대한 눈벽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낡은 삽을 고집하다 눈 속에 파묻힐 것인지, 아니면 낯설고 두렵지만 강력한 '기계 짐승'의 전원을 켤 것인지 말입니다.
소설의 제목이 '부드러운 유혹(The Gentle Seduction)'인 이유는 기술이 우리를 강제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서서히 스며들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거부감을 느꼈던 깃허브 코파일럿(GitHub Copilot)이나 커서(Cursor) 같은 도구들이, 이제는 복잡한 보일러플레이트 코드를 줄여주고 퇴근 시간을 앞당겨주는 든든한 동료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잭이 예언했던 거창한 불멸이나 우주 정복 때문이 아니라, 당장 내 집 앞의 눈을 치우고 생존하기 위해 우리는 기술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지금 LLM과 생성형 AI라는 거대한 기술적 특이점 앞에 서 있습니다. 누군가는 잭처럼 흥분하며 달려들고, 누군가는 소설 속 여성처럼 "나는 그냥 코딩만 하고 싶어"라며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 두려움과 거부감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기술은 우리의 인간성을 훼손하거나 개발자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늙고 지쳤을 때, 혹은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우리의 의지를 계속해서 실현할 수 있게 해주는 확장된 손발입니다.
결국 소설 속 여성은 삽을 내려놓고 기계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삶을 지속하려는 지혜로운 타협이자 적응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눈앞에 쌓인 눈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낡은 삽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도구입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그 '부드러운 유혹'에 한 번쯤 넘어가 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그 기계 짐승은 다루기 쉽고, 무엇보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개발이라는 행위를 더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게 해 줄 테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