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말해, 개발자들 허세가 좀 심합니다. 고작 텍스트 파일 몇 개 옮기는데 쿠버네티스 클러스터부터 구축하려고 들거나, 간단한 모니터링에 월 수십만 원짜리 SaaS를 붙이곤 하죠. 저는 이런 걸 '이력서 주도 개발(RDD)'이라고 부르며 극도로 경계합니다. 도구는 본질적으로 부채(Liability)입니다. 관리해야 할 대상이 늘어날 뿐이죠.
진정한 실력은 화려한 도구가 없을 때 드러납니다. 갑자기 서버 랙(Rack) 공간을 실측해야 하거나, 회의실 모니터 사이즈를 파악해야 하는데 줄자가 없다면 어떻게 할 건가요? "잠시만요, 다이소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할 건가요?
오늘은 가장 원시적이지만 가장 확실한 표준 도구, A4 용지 하나로 상황을 통제하는 법을 공유합니다. 오버엔지니어링 하지 말고, 있는 자원부터 활용하세요.
표준의 미학 : √2의 마법
저는 변하지 않는 '상수(Constant)'를 좋아합니다. 비즈니스 요구사항은 매일 바뀌어도 HTTP 200이 성공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A4 용지도 그런 믿음직한 상수 중 하나입니다.
A4 용지는 단순히 잘라낸 종이가 아닙니다. 여기엔 아주 우아한 스케일링 알고리즘이 숨어 있습니다. 짧은 변을 x, 긴 변을 y라고 했을 때, 종이를 반으로 접어도 그 비율이 유지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핵심 공식
y/x = √2
즉, A4를 반으로 접어 A5를 만들어도, 가로세로 비율은 여전히 1:√2입니다. 이건 마치 데이터베이스를 샤딩(Sharding)해도 스키마 구조가 깨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무한히 확장(혹은 축소) 가능한 완벽한 시스템이죠.
이 비율 덕분에 우리는 A0 용지의 면적이 1m²라는 기준점 하나만 알면 모든 규격을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 A0: 841mm × 1189mm
- A4: 210mm × 297mm
이 숫자, 210과 297은 개발자가 포트 번호 외우듯 머리에 박아둬야 할 숫자입니다. 이것만 알면 세상의 웬만한 물건은 다 잴 수 있습니다.
실전 : 모니터 인치 수 '역공학' 하기
이론은 지루하니 실전으로 들어갑시다. 며칠 전, 너드(Nerd) 친구들과 모여 있는데 꺼진 모니터 한 대가 보였습니다. 누군가 대뜸 "저거 27인치네"라고 아는 척을 하더군요. 저는 검증되지 않은 데이터를 믿지 않습니다. 줄자는 없었지만, 가방에 굴러다니는 출력물(A4)은 있었습니다.
측정은 빠르고 더러워야(Quick and Dirty) 합니다. 정확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차 범위를 인지한 상태에서의 '추정'이 중요합니다.
1. 가로 길이 측정 (Width) A4 용지의 긴 변(29.7cm)을 모니터 가로에 대봅니다. * 한 번 대고(29.7), 두 번째 대고(29.7), 조금 남습니다. * 눈대중으로 남은 공간이 약 1cm 정도 되어 보입니다. * 계산: 29.7 + 29.7 + 1.0 = 60.4cm * 보수적으로 잡아 60cm로 칩시다.
2. 세로 길이 측정 (Height) 이번엔 짧은 변(21cm)을 씁니다. * 한 번 대고(21), 남은 공간을 위해 종이를 반으로 접습니다(A5 크기). * 접은 종이의 짧은 변은 14.8cm입니다. 대보니 모니터가 살짝 모자랍니다. * 약 2cm 정도 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 계산: 21.0 + 14.8 - 2.0 = 33.8cm * 올림 해서 34cm로 칩시다.
3. 검증 (Validation) 가로 60cm, 세로 34cm. 비율을 계산해보면 60/34 ≈ 1.76입니다. 현대 디스플레이의 표준 비율인 16:9 (1.77) 와 거의 일치합니다. 꽤 신뢰할 만한 데이터라는 뜻입니다.
4. 결론 도출 (Pythagoras) 피타고라스 정리를 이용해 대각선 길이를 구합니다. √(60² + 34²) ≈ 68.9cm
1인치는 2.54cm입니다. 68.9 / 2.54 ≈ 27.12인치.
결과적으로 친구의 "27인치"라는 주장은 사실(Fact)로 판명되었습니다. 줄자 없이 종이 한 장과 약간의 산수만으로 검증에 성공했습니다.
오버엔지니어링을 멈추고 '감'을 익히세요
혹자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종이 접다가 생기는 오차는 어떡하죠?", "원자 단위까지 정확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런 분들을 위해 제가 겪은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죠. 예전에 '무한한 정밀도'를 논하며 A0, A1... A∞까지 쪼개겠다는 수학자들이 바(Bar)에 갔습니다. 바텐더는 그들의 주문을 듣다가 그냥 A0 용지 두 장을 던져주며 말했죠. "알아서 나눠 가지슈."
현실 세계의 엔지니어링은 무한한 정밀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허용 가능한 오차 범위 내에서 빠르게 의사결정을 내리는 능력이 훨씬 중요합니다. 서버 트래픽 용량을 산정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한 예측 모델을 만드느라 3일을 쓰는 것보다, 페르미 추정(Fermi Problem)으로 10분 만에 근사치를 내놓고 대응하는 게 낫습니다.
핵심 요약:
- A4 용지의 긴 변은 약 30cm, 짧은 변은 약 20cm라고 뇌에 인덱싱해 두세요.
- 복잡한 도구가 없을 때, 주변의 '표준 규격(Standard)'을 활용해 문제를 해결하세요.
- 완벽함보다는 빠른 추정과 검증이 생존에 유리합니다.
지금 당장 책상 위에 있는 A4 용지를 다시 보세요. 그건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언제든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디버깅 툴입니다.


